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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4) ‘열정의 16세 소년가장’과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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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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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4) ‘열정의 16세 소년가장’과 운명적 만남
1021.jpg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 역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작은 예수님’이다. 그의 이름은 노창우. 상계동 적십자 청소년 야학에서 만난 학생이다. 

상계동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 밤이면 멀리서 봐도 집안이 훤히 보일 정도로 얼기설기 지어진 집. 지독한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남동생과 여동생을 위해 창우가 끓이던 수제비. 거의 비어가던 밀가루 포대와 쭈그러진 냄비. 눈보라가 매서운 날에도 양말을 신지 않았던 창우의 발. 그런 기억들과 대비되는 형형한 눈빛과 밝은 미소…. 

창우는 액세서리 도금 공장에 다녔는데 출근은 오전 7시, 퇴근은 오후 8∼10시였다. 툭하면 ‘조출’과 ‘철야’, ‘특근’을 해야 했다. 

나이는 불과 열여섯이었다. 만성 영양결핍으로 치아가 부실하고 키도 아주 작았다. 공장에서 쓰는 화공약품 중독으로 늘 두통과 콧물을 달고 살았다. 그의 공장에는 열둘, 열넷 소년들도 허다했다. 

오전 5시에 시작했던 야학의 검정고시 특별반에 나오고, 40분가량의 점심시간마다 야학까지 뛰어와 라면을 얼른 먹고 공장으로 돌아가고, 저녁이면 아무리 늦어도 야학에 들렀던 창우. 그 작은 소년이 어떻게 견뎌냈는지. 

한번은 창우와 함께 옆동네 야학에 놀러갔다. 그때 권투경기가 유행이었는데 창우는 혹시 그쪽 친구들과 경기를 하게 될까봐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개울가 공터에서 경기가 열렸다. 창우도 글러브를 대충 찾아 끼고 나섰는데 3분이 채 안 돼 얼굴이 노래지고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상대에게 머리를 한 대 살짝 맞았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쓰러진 창우의 모습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내 가슴에 날카롭게 박혔다. 열여섯 꿈 많은 소년이 기름때 낀 시커먼 옷과 낡은 운동화, 벌어진 입 사이로 누렇게 썩어가는 이를 내보이며 축 늘어져 있었다. 밝은 웃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아니, 내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던 그의 현실과 남루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견뎌 온 ‘가난’의 모멸감과 마주하고 있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그 깊고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서 나는 늘 죄인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비참하고 가련한 창우를,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로부터 어떻게든 가려주고 덮어주려 안절부절못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한 행동이었다. 

얼굴에 찬물을 부어주고 흔드니 한참 만에 창우가 깨어났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예의 그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창우는 그 후 초등·중등·고등 검정고시를 전국 상위 성적으로 2년 만에 합격했다. 일요 독서모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덩치 큰 학생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리더십을 보였다. 

야학 교사들은 그가 대학에 가기를 바랐고 도와줄 의향도 있었지만 그는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전 조금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가난한 내 형제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그것이 제게 주어진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결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 뒤 그는 서울 구로공단으로 갔다. 공장 일을 하며 어린 노동자들을 돕고,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이후 안산으로 옮겨가서도 열심히 일할 뿐 아니라 앵벌이 아이들을 불러다 자취방에서 돌보고 공부도 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5년여 후, 상계동 도깨비시장에 ‘나눔의 집’을 연 뒤인 1986년 10월 어느 늦은 밤. 누가 부른다기에 나가보니 골목 저 끝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서 있는 폼만 봐도 창우였다. 그날 본 것이 마지막 창우의 모습이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