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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3) 가난… 가족과 생이별… 할머니와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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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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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3) 가난… 가족과 생이별… 할머니와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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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장 외로웠던 때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 2학년까지 4년여 간이다. 집안 사정으로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 가면서 나만 전주 할머니 댁에 남겨졌었다. 할머니와 단 둘이 연탄불도 없는 방에서 겨울을 나고, 봄꽃이 피어나기 시작할 때면 서러움이 사무쳤다.
집 옆 철길을 따라 서울로 향하는 기차 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근처 벽돌 공장에 쌓아놓은 벽돌 더미 속으로 들어가 한참 울어야 그 울적함을 견딜 수 있었다.
어디서 온 것인지 할머니댁 방바닥에는 푸른 표지의 기드온 신약 성경이 굴러다녔다. 내용도 모르면서 스륵스륵 넘겨보곤 했다. 눈에 띄는 부분을 몇 줄 읽다 덮는 식이었는데 그런 중에도 ‘평안함’이라는 이미지를 느꼈다. 지금은 어느 대목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유독 그런 부분만 눈에 띄었던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가 아니었을까.
그 이후 서울로 올라가 가족들과 살면서도 울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론가 떠나는 기차 꽁무니를 보며 “여긴 내 자리가 아닌데” 중얼거리던 그 마음은 밑바닥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공부 잘 하고 가난한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던 서울 유한공고 재학 시절, 나는 일찌감치 취직 시험을 봐서 대기업 여럿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담임선생님은 야간대학이라도 들어가길 권하셨지만 나는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어떤 방향을 바라봐도 “인생을 걸어보자”는 열정을 품을 수가 없었다.
대학에 진학한 것도 내 의지를 넘어서는 일들이 연속된 결과였다. 선생님의 끈질긴 권유로 여러 학교에 시험을 쳤는데 하필 학비도 비싸고 장학금도 받을 수 없는 연세대 건축학과에 합격했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면접날 청량리역으로 가서 춘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가 출발 전 ‘삑’ 하고 경적을 울리는데 어머니가 떠올랐다. 지겹게도 고생하시면서도 곱기만 한 어머니 얼굴, 그 얼굴에 슬픈 표정이 어릴까 두려워져 기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 길로 신촌까지 몇 시간을 걸어갔지만 끝내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다음날에야 나는 연세대 건축학과 학과장 이경회 교수님실로 쭈뼛쭈뼛 찾아갔다. “면접 끝났다”는 말이 날아올 것을 알고서, 그로써 마음을 정리하러 간 것이다. 그런데 교수님은 내 초췌한 몰골에서 알아채셨는지 대번에 “네가 송경용이지?” 하셨다.
교수님은 다짜고짜 나를 승용차에 태우시더니 본관 학적과로 데려가셨다. 그리고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어서 등록하라”고 재촉하셨다. 알고 보니 대학원 시험문제 출제를 위해 합숙소에 들어가는 길이셨다. “너, 몇 분만 늦었으면 입학 못했을 줄 알아. 3월에 보자!”
그 몇 분은 어떤 의미였을까. 몇 년 후 성공회대 편입을 위해 이 학교를 그만뒀으니 큰 의미는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곳에 다닐 때 인생의 전환점과 귀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일했던 서울 강남 룸살롱의 화려함과 캠퍼스의 발랄함 양쪽에서 모두 이질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던 나는 대학 선배들의 소개로 상계동 적십자 청소년 야학에 가서야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해졌다. 조금만 나가도 불암산과 과수원, 논밭이 펼쳐진 환경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릴 때의 벽돌 공장과 똑같은 공장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봉제공장 ‘시다’ 여학생들, 새카만 얼굴에 눈만 반짝이던 남학생들, 너무나 성숙해 말 걸기도 어려웠으나 참으로 친절했던 ‘누나 학생’들 덕분이었다. 그중에서 ‘나의 작은 예수님’ 창우를 만난 일을 잊지 못한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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