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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2) 웨이터 일하며 만난 세상이 날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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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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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2) 웨이터 일하며 만난 세상이 날 깨우다

1019.jpg 1979년 어느 날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룸살롱. 손님들이 방마다 꽉 차 있고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데 갑자기 한 방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울렸다. ‘77번 아가씨’였다. 곧이어 남자의 욕설과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선배 웨이터와 함께 방으로 뛰어 들어가자 옷이 다 찢어진 아가씨가 한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문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물 좀, 얼음 좀 주세요!” 하기에 얼음물을 입에 부어줬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독한 양주를 얼마나 먹였기에…”라고 중얼거리는데 손님들이 방에서 나가려 했다. 아가씨는 얼른 몸을 일으켜 한 명의 바지를 붙들었다. “팁 주셔야죠, 팁!” 애원하는 아가씨에게 손님은 “못 줘!”라며 발길질을 해댔다. 내 손에는 좀 전까지 얼음 덩어리를 깨던 송곳이 들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팔뚝에 힘을 주는데 누군가 팔을 들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선배 웨이터가 그 손님 멱살을 부여잡고 어서 팁을 주라고 으르자 기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손님이 지갑에서 지폐를 한 움큼 꺼내더니 박박 찢어 공중에 날린 것이다. 아가씨는 “내 돈, 내 돈!” 하면서 흩날리는 돈 쪼가리들을 모으려고 두 팔을 허우적댔다. 

33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눈에 선한 장면이다. 마치 영화로 찍어 꾸준히 꺼내 봐왔던 것만 같다. 세상의 부조리를 죄다 모아 놓은 듯한 그 순간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입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들어가 1년 가까이 일했던 룸살롱을 그날로 그만뒀다. 그동안 화려하고 바쁜 공간 속에서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남루한 사람들에 대해 분노와 연민을 앓는 한편, 서서히 체념하고 안주해 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대학생인 것을 부럽고 대견하게 봐 준 선배 웨이터 택수 형에게 책을 권해주고 함께 읽으면서 독서모임도 만들었다. 영업이 끝나면 주방 아주머니와 아가씨들까지 끌어들여 번듯한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다. 학교에 가면 땅 밖으로 고개를 내민 두더지처럼 어지럼증을 느끼고, 여기 들어오면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나는 대충 내려놓고 싶었던 짐을 다시 짊어지기로 결심했다. 손님들이 먹다 남긴 술과 안주를 놓고 직원들과 침울하게 둘러앉아 있는데 마침 택수 형이 “경용아, 너도 대학 다니니 저런 인간들처럼 살 거냐? 그럴 거면 다 때려치워라!”고 외쳤다. “형, 나도 더 못 있겠어. 나 나갈래. 미안해요, 형!” “그래,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나도 열심히 살 테니 너도 공부 잘해서 확 갈아엎어버려!” 

택수 형은 봉투를 쥐어주고 손수 택시까지 잡아줬다. 택시 좌석에 기대 앉아 신사동 로터리를 지나 제3한강교를 지났다. 뺨에 닿는 바람이 상쾌했다. 

그 뒤로 두어 달은 학교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여름방학에는 부천 공사장 잡부로 일하고, 농촌봉사활동, 수련회도 쫓아다녔다. 그러다 9월 28일, 당시는 알지도 못했던 하나님으로부터 신호가 당도했다. 선배 두 명이 만나자고 하더니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우리 야학 같이 하지 않을래?” 

나는 “지금 바로 가면 안 될까요?”라고 묻고는 선배들과 함께 신촌의 식당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상계동으로 향했다. 상계3동 적십자회관을 빌려서 하던 학교에 들어선 것은 밤이 이슥한 시간이었다. 그곳의 냄새와 분위기, 사람들의 눈길은 내게 “아,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속해 있었던 곳 같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곳이 내 인생이 됐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