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경용 (27) 영국서 선교단체·대학·한인교회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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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6:12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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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사태 직후 가족 단위 노숙인를 위해 임시로 만들었던 쉼터 ‘살림터’를 서울 사당동에 제대로 다시 짓는 일은 지역 주민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9개월이나 지연됐다. 장애인공동체와 작업장 등이 들어갈 봉천동 ‘함께하는 세상’ 건물 공사 과정도 난관의 연속이었다. 이런 일들에 신경을 쓰다 다시 몸에 탈이 났다. 오른쪽 배에 극심한 통증이 오는데도 ‘어떻게든 다 해결될 때까지만 참자’고 하다가 급기야 밤새 데굴데굴 구르는 지경까지 갔다.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메추리알만한 결석이 대여섯 개나 나왔다. “무식하게도 참으셨네요”라는 의사에게 변명할 말도 없었다. 그때쯤 크라우더 홀 칼리지에서 강사 겸 연구원으로 2년간 와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거절하려 했는데 수술 직후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대로는 1년 이내에 모든 체력과 에너지가 소진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살림터’와 ‘함께하는 세상’ 완공은 보고 갈 수 있었다. 동료, 후배 활동가들은 이미 각 분야에서 경험을 충분히 쌓은 전문가들이었기에 걱정되지는 않았다. 물론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럼에도 “최소 1년간 연락하지 마라”고 야박하게 말하고는 비행기를 탔다. 2003년 9월이었다. 영국 체류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크라우더 홀 칼리지에서는 예정보다 짧은 1년간 있었고 다음 1년은 영국 선교단체 CMS 런던 본부에서 동북아지부 컨설턴트로 일했다. 이 일이 끝날 때쯤 런던 대학 한국학생 담당 교목을 맡게 됐다. 동시에 런던성공회 한인교회 관할 사제도 맡아 2009년 11월까지 일했다. 그 6년가량은 20대 초반부터 쭉 정신없이 달려온 내게 주어진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지난 사역을 정리하고, 책도 쓰고, 가족들과 함께 평화롭게 보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떨어져 있어 보니 더욱 소중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 밤이나 안개가 호젓하게 낀 오후, 상쾌한 공기 속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늘 떠오르던 ‘함께 걷고 싶은 사람들’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를 이끌고 깨우치고 밀고 받쳐 준 동료들이었다. 지금도 뙤약볕 아래 길거리에서 또는 볕도 들지 않는 좁은 쉼터에서 노숙인, 장애인, 청소년, 집 잃은 사람들과 매 맞는 여성들, 몸 파는 누이들과 함께 있을 활동가들을 생각했다. 지치고 취하고 늘어진 육신과 영혼들을 부둥켜안고서 ‘한번 더 살아보자’고 씨름하다 함께 잠이 들었을 것이다. 산동네에서 지하도에서 길거리에서 밥을 짓고 퍼 나르고 있을 것이다. 의자도 책상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좁은 사무실 겸 식당 겸 회의실에서, 또는 동네 어느 식당에서 찌개 하나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내가 ‘가난과 예수’를 붙들고 살 수 있게 해준 모든 영성의 원천은 그들이라는 것을, 그런 ‘인복’ 속에 살아온 나는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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