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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21) 비전향 장기수 ‘화해의 십자가’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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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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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21) 비전향 장기수 ‘화해의 십자가’를 만들다

1038.jpg “제가 젊었을 때 조각을 좀 배웠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한번 해 보겠습니다.” 

1992년 9월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이 화재로 전소된 후 한창 재건 공사가 진행 중일 때, 비전향 장기수 출신인 금재성 선생께서 “십자가를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여기서 ‘젊었을 때’라는 것은 40년도 더 전의 시절을 말한다. 

“저희에게는 아주 큰 영광이죠. 꼭 부탁드립니다!” 기독교인이 아닐 뿐더러 정치적 신념을 꺾지 않아 30년이 넘게 좁은 독방에서 지내신 분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는지 놀랍기도 하고 감사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우리가 서로 마음을 나누었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기뻤다. 

그 이튿날부터 금 선생은 나눔의 집 바로 옆 ‘똘이 문방구’에서 1000원짜리 조각칼을 사서 공사현장의 나무 조각으로 연습을 거듭하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일해 온 역사를 조사하고, 십자가를 살펴보러 서울 시내 교회와 성당을, 좋은 나무를 고르기 위해 목재소를, 수십 군데도 넘게 다니셨다. 

“조선의 예수, 일하는 사람들의 예수를 십자가에 새기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 한 달 이상 보이지 않으셨다. 시간이 흘러 나눔의 집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십자가를 가지고 오셨다. 

‘조선의 예수, 일하는 사람들의 예수’ 그대로였다. 연꽃 문양이 들어간 받침대, 머리의 상투는 조선을,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른 몸과 그에 대비되는 근육이 불거진 팔은 노동자인 예수를 표현하고 있었다. 40여 년 만에 조각칼을 잡으신 분이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십자가를 벽에 걸고 첫 미사를 드렸던 때의 벅참과 떨림이란. 30여 년을 감옥에서, 고난에 찬 인생을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땀과 정성이 배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상과 이념으로 갈라졌던 우리 민족이 십자가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화해의 상징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예수님이 그분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고자 하셨다고 믿는다. 그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방법은 오로지 ‘조건 없는 나눔’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십자가로 인해 나눔의 집은 해외 기독교계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됐다. 그 내력을 설명해 주면 다들 감동을 받곤 한다. 

금 선생은 본래 건강한 분이셨지만 원체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하셨던 탓인지 통일을 보지 못하고 남한에서 돌아가셨다. 병석에서 내 손을 꼭 붙잡고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셨던 것을 잊을 수 없다. 

한편 나눔의 집 화재 사건은 내게 큰 시련이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계기이기도 했다. 바로 국내 최초의 건설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사회적 기업’의 초창기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나레건설’을 만들게 된 것이다. 

당시 등록된 주식회사 중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졌던 ‘나누며 섬기는 건설노동자 공동체 협동조합 나레건설’이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