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경용 (20) 불탄 나눔의 집… 재기 돕는 손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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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6:06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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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의 원인은 밝힐 수 없지만 어쨌든 이유 불문하고 책임자인 내 탓일 수밖에 없었다. 망연자실해 있는데 주민과 청년들, 후원자들이 속속 모여들어 같이 걱정하고 위로해 주었다. 뭐라도 남은 게 있나 폐허 속을 뒤져 보기도 했다. 그러나 건질 게 하나도 없었다. 나눔의 집 벽에 걸려 있던 나무 십자가는 가느다란 골격만 새까맣게 남아 있었고 미사 때 쓰던 성물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녹아 있었다. 그 상실감과 막막함은 그날 밤 나를 꼬박 그 자리에 앉아 있게 했다. “그래도 힘을 내자, 함께할 사람들이 있지 않나!” 이렇게 다시 일어서도록 결정적인 힘이 돼 준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장모님이다. 어렵게 모은 적금을 깨서 거금 600만원을 가져오신 것이다. 당신의 외동딸과 손자들을 호강은 못 시킬망정 제일 가난한 동네를 골라, 심지어 물과 전기도 끊긴 곳에서 깡패들의 폭력이 난무하는 철거민촌이 될 때까지 살게 하는 데도 원망 한 번 않으시고 오히려 곁으로 이사 오셔서 기도하고 격려해 주신 장인 장모님. 두 분은 내 가장 큰 지원군이었다. 특히 화재 때 행여 내가 낙심할까 봐 서둘러 적금을 깨러 뛰어가셨을 장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또 다른 분은 봉천동 나눔의 집 인근에서 생활하신 장기수 중 한 분인 금재성 선생이다. 원래 남쪽 출신이나 해방 이후 북에 가셨던 분으로 북에서 대학교수, 군 여단장을 지낸 인텔리 출신이었다. 남쪽에 친척도 있었지만 부담을 줄까 봐 강남 연립주택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혼자 사셨다. 나눔의 집 재건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날 새벽, 폐허 위에서 미사를 드리고 난 뒤 마당에 내려가 보니 금 선생이 와 계셨다. 이미 목장갑을 끼고 쓰레기를 치우고 계셨다. “직장은 안 가시고 어떻게 이렇게 나오셨어요?” “아니, 지금 직장이 문제요? 걱정하지 말아요. 뭐부터 시작하면 좋을지나 알려 주시오.” 선생은 일흔이 훨씬 넘은 몸으로 가장 힘들다는 질통 지는 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분뿐 아니라 장기수 선생들은 하나같이 “저러다 건강 상하실라” 소리가 나오도록 열심히 공사를 도와 주셨다. 비단 당신들이 신세를 진 곳이어서라기보다는, 진심으로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는 집으로서 ‘나눔의 집’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본다. 봉천동에는 그렇게 사상도 이념도 신앙도 다르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많았다. 그 넓은 마음들 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금 선생이 내가 담장 위에 꽂아둔 까만 십자가를 바라보시다가 “제가 십자가를 새로 만들어도 될까요?” 하셨다. 왁자지껄하게 점심을 먹던 사람들이 일순 잠잠해졌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가, 그것도 북에서 내려온 ‘비전향 장기수’가 십자가를 직접 만들어 주겠다니 말이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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