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경용 (19) 봉천동엔 10여년간 ‘장기수촌’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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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6:05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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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중심은 아무래도 처음 모셔온 두 분이었다. 특히 북에 있을 때 고위직을 지냈다는 김 선생은 인텔리이자 전형적인 ‘이론가’였다. 늘 책을 가까이 하셨고 TV 뉴스와 신문도 빠짐없이 챙겨 보셨다. 국내외 정세와 인물평 등에 대해 토론하다가 젊은 사람들이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면 “허허, 그게 아니디요” 하면서 짚고 넘어가곤 하셨다. 장기수 ‘동지’들이 많아진 뒤에는 ‘규율반장’ 역할을 톡톡히 하셨다. 기강이 해이해지면 폐가 된다는 생각에 노심초사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원칙적이고 논리정연한 분이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숨이 차서 말을 못할 정도로 우셨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과 침을 옆에서 누군가 닦아줘야 할 정도였다. 우리 간사 한 명이 “에이, 선생님 또 우신다” 하고 어깨를 주물러 드리면 꽉 메인 목소리로 “내가 뭐이 울어” 하며 웃으시던, 그런 뒤 한참 동안 충혈 된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시던 김 선생. 늘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다하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셨지만 내게 넌지시 “나눔의 집 같은 교회라면 북에도 동네마다 생기면 좋겠어” 하시던 선생은 북으로 송환된 지 5년여 만인 2006년 돌아가셨다. 북에서 보낸 5년간은 부디 가족과 함께 행복한 나날이었기를. 그런가 하면 조 선생은 ‘봉천동 최고 인기 장기수’셨다. 부드러운 성품과 부지런함도 돋보였지만 아이들을 특히 사랑하셨다. 북에서 나올 때 젊은 아내와 두 살, 네 살배기 아이들을 두고 나오셨다니 그러실 만도 했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거나 품에 꼭 안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보고 싶으시면’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때로는 엄마들이 바쁠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가게에서 과자를 한 아름 사주기도 하셨다. 엄마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우리 가족과도 특별히 가깝게 지내셨다. 매운 김치를 못 드셔서 우리 어머니와 장모님이 만들어 드리는 물김치 백김치를 무척 좋아하셨다. 1960년대 초까지 북에 있던 기독교인의 모습에 대해 당신이 보고 경험한 범위 내에서 증언해 주시기도 했다. 북에서 고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기관사 일을 하셨다지만 말씀은 논리정연하고 힘이 있었다. 2000년 송환되시기 직전에는 내 아내를 동네 금은방으로 데려가 “여기서 제일 비싸고 좋은 반지 하나 주시오!”라고 해서 손가락에 끼워 주셨다. 출소 직후부터 노동일을 하며 모은 돈도 남은 동지들을 위해 쓰라고 남겨두고 가셨다. 북에 가셔서 다행히 생존해 계셨던 아내, 이미 결혼해 가정을 이룬 두 자녀, 손자손녀들과 함께 잘살고 계신다는 소식이 들려 와 기쁘다. 한편 마음대로 목소리 듣고 만날 수 있는 시대는 언제나 오는 것인지 답답해지기도 한다. 또 한 분, 금재성 선생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92년 9월 나눔의 집에 닥쳤던 화재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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