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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16) 전국 첫 장애인작업장, 공동체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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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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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16) 전국 첫 장애인작업장, 공동체로 이어져

1033.jpg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을 설립한 1990년대 초부터 그 동네 모든 집이 철거된 1999년까지 나는 봉천동 가장 가난한 동네 비탈길의 작은 집에 살았다. 그 바로 윗집이 어머니댁이었고 그 윗집에 ‘정현 할머니’가 사셨다. 

정현 할머니는 오가다 어머니를 만나면 평상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세 한탄을 했다. 주로 30대 중반의 나이에 지능은 세 살 수준인 아들, 정현씨를 돌보는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다. 

길가 호떡집 앞에서, 장난감 가게 앞에서, 구멍가게 아이스크림통 앞에서 수시로 떼를 쓰는 덩치 큰 아들을 가냘픈 노인이 달래는 모습은 동네의 일상 풍경이자 보는 사람까지 숨 막히게 하는 무거운 현실이었다. 

아내가 특수교육을 전공한 장애아동 교사이고, 교회와 시설 등에서도 적지 않게 장애인들을 접해 온 나였다. 그럼에도 이웃으로 매일 마주하고서야 “장애 당사자와 가족의 삶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게 가난했는데도 정현 할머니는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었다. 아들과 둘이 사는 손바닥만한 판잣집이 본인 소유였기 때문이다. 큰아들도 있었는데 울산에서 일용직 건설노동일을 했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리 멀리 사는데 어떻게 부양하라고 해요. 시어미 입장도 그렇지. 어렵게 사는 며느리한데 부담 주느니 내가 고생하는 게 나아요.” 

아무리 잘 만든 법률과 정책이라도 사각지대는 있겠지만, 이런 상황을 온전히 한 개인에게 맡겨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나는 할머니가 생활보호대상자가 되도록 동사무소와 구청, 복지부에까지 탄원을 했다. 그렇게 간신히 대상자가 됐지만 등급이 낮아 공공근로를 해야만 일당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날, 정현 할머니가 맡길 데 없는 정현씨 손을 잡고 동사무소 앞에 서 있다가 출결 검사를 받은 뒤 쓰레기를 주우러 가는 모습을 나는 몇 번이나 지켜봤다. 그나마도 예산이 삭감된 뒤로는 나가는 날도 줄고 받을 수 있는 일당도 줄었다. 

정현 할머니는 늘 내게 “신부님, 우리 아들 같은 사람 돌봐주는 데 하나만 만들어 주셔요. 그럼 제가 빨래고 밥이고 다 해드릴게요”라고 했다. 내가 “그러지 마시고 무슨 무슨 동네도 있고, 시설에 맡겨 보시지요”라고 하면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멀리 보내놓고 제가 잠이 오겠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내 자식인데, 못난 어미 만나 고생하는데, 힘들어도 같이 살아야죠.” 

넋두리는 늘 “그저 제발 저 녀석 먼저 보내놓고 바로 따라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로 끝났다. 팍팍하고 대책 없어도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게을러서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정현 할머니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됐다. 

그 깨달음이 밑거름이 돼 96년 나눔의 집 인근에 자활후견기관이 설립됐고 전국 최초로 장애인 작업장이 설치됐다. 99년에는 장애인 생활공동체도 마련됐다. 안타깝게도 정현씨는 그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살던 집까지 철거된 뒤 아무 연고도, 정든 이웃도 없는 임대아파트로 이사 나가던 모습이 할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이 생활공동체와 작업장을 통해 나는 가난한 장애인들의 삶을 직면하며 충격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환한 웃음과 희망을 만나기도 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