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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15) ‘무거운 십자가’로 남은 봉천동 3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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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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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15) ‘무거운 십자가’로 남은 봉천동 3남매

1032.jpg 1995년쯤 어느 날,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에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 보니 사람은 없고 문간에 중국 요리 몇 가지와 흰 봉투가 놓여 있었다. 

골목으로 뛰어 나가니 배달 오토바이를 탄 소년이 뒤를 돌아보며 씽긋 웃고는 가버렸다. ‘봉천동 3남매’의 막내였다. 신문 지국에서 생활하며 새벽에는 신문 돌리고, 낮에는 학교 가고, 저녁과 주말에는 중국집 배달 일을 했던 막내가 첫 월급을 탔다고 두고 간 것이었다. ‘헌금’이라고 정성스레 쓴 봉투 안에는 5만원이 들어 있었다. 

94년 알코올 중독 아버지에게서 끔찍한 폭행을 당한 채 발견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3남매는 이후로도 한동안 그 집에서 살아야 했다.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상이 돼 버린 ‘지옥’속에서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견뎌냈다. 조금씩 커가면서 아버지의 폭력에 맞서기도 했고 위의 둘은 다른 동네로 독립해 나갔다. 

중학생인 막내도 신문지국에서 생활하면서 반은 독립한 셈이었지만 동네를 떠나기에는 어렸다. 밝고 귀여운 성격으로 나눔의 집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지냈고 주일에는 미사를 돕는 ‘복사’역할도 했지만 실상 그의 삶은 ‘생존 투쟁’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두고 간 봉투를 보며 나는 목이 메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그처럼 손이 떨리고 가슴 벅찬 봉투를 받아 본 적이 없다. 그 주 주일에 그 봉투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미사를 드렸다. 

95년 여자 아이들을 위한 청소년쉼터를 개설한 데 이어 97년 남자 청소년 쉼터를 열었을 때 막내는 잠시 그곳에서 생활했다. 쉼터의 대장이자 군기반장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군대에 다녀와서 쉼터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하고,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며 공부에 열을 올린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말하자면 ‘고생 끝에 낙이 왔다’고 하기는 어렵고 ‘아직은 방황 중’인 편이다. 형과 시집 간 누나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직도 3남매는 내게 무거운 십자가다. 그 길고도 길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돌아보면, 그들이 커서 아무리 환경이 좋아진다 해도 완전한 치유는 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살다가 문득문득 아픔이 살아나고, 자존감이 사라지고, 억울함과 울분이 터져 나올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으리라는 절망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아이들은 아직 바다에 이르지 않은 강물이라 믿는다. 강물이 바다까지 가려면 굽이치는 길, 좁은 길, 험한 길을 묵묵히 지나야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어도 그렇게 가다 보면 결국은 바다에 이르고야 만다고 나는 믿는다. 

3남매가 우리에게 청소년 쉼터의 필요성을 일깨웠다면 나눔의 집에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작업장이 설치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들도 있었다. 

바람불면 훅 날아갈 것처럼 작고 가냘팠던 할머니, 우리가 ‘정현이 할머니’라고 불렀지만 실은 정현씨의 어머니였던 분. 30대 중반의 나이에 지능은 세 살 수준, 간질병까지 갖고 있던 정현씨를 일평생 돌보셨던 그분을 통해 나는 빈곤과 장애, 장애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