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경용 (14) ‘위기의 청소년’ 보호 위해 쉼터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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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6:02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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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에 가보니 큰 어린이는 쇄골, 둘째는 갈비뼈가 부러졌고 막내는 머리가 터졌으며 얼굴에도 심각한 상처가 있었다. 셋 다 등과 배 곳곳에 허리띠로 맞은 자국과 주먹만한 멍이 수도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12월 29일 밤부터 2박3일을 작은 방에 갇혀 밥도 못 먹고 온갖 벌을 서면서 죽도록 맞았다고 했다. 1월 1일 새벽에야 겨우 탈출해 나눔의 집까지 기어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만일 휴일이라고 아무도 나가 보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방치돼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어린이들 상처를 살펴보던,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주로 진료하던 ‘사당의원’의 의사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신부님! 아이들 좀 살려 주세요!” 어린이들을 살려 달라고 데려온 나에게 의사가 도리어 애원하는 것이었다. 상처는 당장 치유할 수 있어도 이대로 두면 어린이들이 종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나는 그제야 어린이들을 그 집에서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 한동안은 내가 노력하면 아버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도 했었다. “기왕 술을 드실 거면 저하고만 드세요”라고 부탁도 해 봤고, 연락이 오면 술 한 병 들고 가기도 했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어준 뒤 기도해 주고 함께 찬송을 부르기도 했다. 어린이들에게 아버지가 술심부름 시키면 내게 이르라고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연락할 때 쯤이면 만취된 상태였고, 여전히 어린이들을 때리고 술심부름을 시킨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뒤로는 엄격하게도 대했다. 술병을 깨트려 버리기도 했다. 알코올 전문기관에 여러 차례 입소시켜도 봤다. 모두 소용없었다. 나눔의 집에 피신해 있는 어린이들을 찾으러 와서 간사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3년가량이나 겪고 나니 나도 알코올 중독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꼈고 한계도 절감했다. 그렇게 손놓고 있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3남매뿐 아니라 갈 곳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자는 생각에 나눔의 집 후원 모임 ‘두레 벗’과 함께 8000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모금했다. 그해 5월, 상대적으로 더 위급한 상황에 있는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쉼터를 봉천동 작은 연립주택에 마련했다. 당시만 해도 ‘쉼터’라고 하면 고속도로 휴게소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고, 쉼터가 어린이들 가출을 부추길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어린이들과 24시간 생활하며 상처를 보듬고 교육할 수 있는 ‘전문 일꾼’을 찾는 것이었다. 다행히 남철관이라는 사회복지학 전공자를 소개받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우리에게로 왔던 그는 지금 나눔과미래 사회적기업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어서 귀한 인재들이 속속 합류해 여자어린이 쉼터 ‘행복한 우리집’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청소년 쉼터의 개념을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남자어린이를 위한 쉼터는 그로부터 2년 후에야 만들 수 있었다. 소극장과 노래방, 컴퓨터실 등 문화 시설을 겸비한 곳이었다. 그러나 쉼터가 3남매의 삶을 확 바꿔 준 것은 아니었다. 쉼터가 마련되는 동안 아이들의 삶이 기다려 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장 병원에서 나온 어린이들은 또다시 지옥 같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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