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13) ‘청소년 쉼터’ 필요성 일깨워준 3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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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6:01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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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쯤 그 집에 처음 찾아갔을 때, 단칸방 안에는 소주병이 널려 있었고 부엌에도 문 밖에도 온통 술병이었다. 부모는 의외로 둘 다 공부할 만큼 한 사람들이었다. 한때는 경제적으로 괜찮은 가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사업이 어렵게 되면서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가정에 균열이 생겼다. 통상 그렇듯이 폭력이 뒤따랐다. 엄마는 폭력을 못 견뎌 집을 나갔다고 했다. 막내는 어딘가에 맡겨져 있고 두 아이만 이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 삶은 아버지 술심부름을 하거나, 얻어맞거나,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며 벌벌 떠는 일상으로 꽉 차 있었다. 첫째 여자 아이는 얼굴도 예뻤고 그림도 잘 그렸다. 심성도 고와서 더 안쓰러웠다. 둘째 남자 아이는 나눔의 집에서 엄마 같은 선생님들이 보살펴 줄 때는 귀엽게 굴었지만 밖에만 나가면 봉천동 일대를 휘어잡는 ‘실력자’였다. 아홉 살 때부터 별명이 ‘봉천동의 작전부장’이었단다. 십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파출소 순경은 상대가 안 되어 경찰서 형사과에서 직접 관리하는, 그 세계의 ‘거물’이었다. 한 번은 우리 집에까지 들어와 결혼 예물이었던 14k 반지와 목걸이까지 가져갔고, 나눔의 집 물건들과 봉사자의 지갑도 수시로 털어 갔다. 불러다 혼내고 야단치고 품어주기도 했지만 다음날, 아니 한 시간도 안 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집에만 돌아가면 술 취한 아버지와 폭력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무언가 요구한다는 게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봉천동의 이른바 ‘문제 청소년’ 70여명을 다 겪어봤지만 이 ‘작전부장’처럼 속 썩인 아이도 없었다. 어느 날 삼남매의 막내가 등장했다. 누나 형과 같이 살기 위해 왔다고 했다. 비록 남의 집이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영양 상태도 좋고, 성격도 순하고 착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며 형 누나처럼 표정이 변해갔고 옷차림도 남루해졌다. 형의 불량한 행동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무리를 따라다녔다. 그렇게 안타까운 하루하루가 지나고, 94년 새해 첫 날이었다. 영하 13도나 되는 몹시 추운 날, 이른 아침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한시바삐 나눔의 집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기도하면서 뛰다시피 대문에 들어선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린다. 대추나무가 있던 화단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삼남매가 쓰러져 있었다. 큰 아이 어깨를 잡는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쇄골이 부러져 있었다. 둘째도, 막내도 움직이기는커녕 눈도 뜨지 못 했다. 분노가 솟구쳤지만 수습부터 해야 했다. 1월 1일이라 도와 줄 사람이 없었다. 파출소에 전화를 해 봤지만 순찰차가 없다고 했고 택시를 부를 수도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나눔의 집 후원 모임인 ‘두레 벗’의 한 회원에게 연락이 닿았고 고맙게도 멀리서 차를 가지고 와 주었다. 다행히 문을 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 ‘사당의원’에 데리고 갔다. 찬찬히 살펴보니 상태가 이만저만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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