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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12) 누워 있던 소년가장, 사회인으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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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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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12) 누워 있던 소년가장, 사회인으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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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본격적으로 봉천동 ‘나눔의 집’ 사역을 시작하고서 얼마 후, 동네 통장님인 복덕방 사장님이 찾아와 “아주 어려운 가정이 있다”면서 민영이네를 소개했다. 보증금 100만원에 9만원인 월세를 9개월이나 밀려 주인이 곧 내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찾아가 보니 바깥보다 더 추운 지하방인데 10대 남자아이 하나가 벽 쪽으로 누워 있었다. 말을 걸어 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옆방에 물어보니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세 식구인데 겨우내 불 한 번 때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아이는 석 달 넘게 누워만 있더라고 했다. 부엌을 보니 풍로와 작은 냄비가 있을 뿐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이 없었다.
급한 대로 쌀과 연탄, 김치와 반찬을 들여 놓고 이튿날 다시 가 보니 다행히 음식은 좀 먹었지만 연탄은 여전히 때지 않은 채였다. 여동생이 있기에 물어 보니 “어떻게 불을 피우는지 몰라요”라는 것이었다.
복덕방 사장님을 찾아가 석 달치 월세를 건네며 “집주인께 잘 말씀 드려서 내쫓지 않도록 해 주세요” 부탁했다. 그러자 사장님은 “내가 주인이오” 하면서 즉석에서 영수증을 써 주는 것이다. 드물게 온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인연을 맺어 각별히 관심을 보였지만 유독 민영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자 간사님이 거의 매일 찾아가 지극정성으로 여동생을 돌봐 주자 석 달째쯤 비로소 부스스 일어나 인사를 건네었을 정도다. 막상 마주 대하니 얼굴도 준수하고 목소리도 또렷했다.
들어 보니 민영이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심한 우울증을 앓아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거기서 지내다가 다시 함께 살게 됐지만 어머니는 1년이면 몇 번씩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동생은 너무 어렸다. 민영이가 생계를 위해 염색 공장에 다녔는데 하루 열두 시간씩 일을 하다 만성 두통을 얻었다. 그 결과 불과 10대 중반의 나이에 자리를 지고 눕게 된 것이었다.
누워만 있으면 더 안 좋을 것 같아 “나눔의 집에 나와서 일을 도와주지 않을래?”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던 중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려버려 쫓겨날 상황이 됐다. 봉천동 주민과 여동생의 학교 선생님들께 부탁드려 성금을 모았는데 한 푼 두 푼 모인 돈이 새로 방을 얻고 생활비 통장까지 만들어 줄 정도가 됐다. 그 어떤 기부보다 크고 따뜻한 산동네의 온정이었다.
그렇게 1년이 다 돼 가던 어느 날 나눔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당에 민영이가 서 있었다. “웬 일이야, 무슨 일이야?” 하고 묻자 민영이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저, 나눔의 집에 나올래요” 하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주님, 아멘!”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 다음 날부터 민영이는 나눔의 집에 출근하고 오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에 나갔다. 얼마나 성실하고 듬직했는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시간이 갈수록 성격도 밝아졌다. 더 기뻤던 일은 매 주일 미사를 돕는 복사가 돼 준 일이다.
공부를 시작한 지 단 2년 6개월 만에 민영이는 검정고시를 다 통과하고 서울 시내 웬만한 대학을 다 갈 수 있는 성적을 받아냈다. 장학생으로 진학해 첨단공학을 전공한 민영이는 지금은 첨단 기계를 수출하는 회사에 다니는 당당한 사회인이 돼 있다. 나눔의 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달려와 양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민영이, 그는 나눔의 집의 긍지이자 보람이다.
이렇게 좋은 만남도 있는 반면 마음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는 인연도 있다. ‘봉천동 3남매’가 그런 경우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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