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11) ‘또 다른 나눔의 집’ 세움으로 첫 사역
페이지 정보
나눔과미래 16-07-15 15:59본문
|
![]()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이셨던 김성수 주교님께 상의를 드렸을 때도 “네 소신대로 계속해 보라”는 격려를 해 주셨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기빈협), 천주교도시빈민회(천도빈) 등에서 추천해 준 서울 봉천동을 낙점했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로부터 ‘봉천동 나눔의 집 설립’을 허락받은 것이 90년 9월. 다음 달부터 두세 달 정도 지역조사에 나섰다. 당시 그 지역은 이미 재개발 바람이 불어 10평도 안 되는 판잣집이 7000만∼8000만원을 호가했다. 셋집 구하기도 쉽지 않아 “천막을 쳐야 하나”라는 고민을 상계동 때에 이어 또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놀라운 도우심의 손길이 있었다. 그때 서울교구에 1억원에 가까운 선교 자금이 있었는데 김 주교님께서 내 쪽으로 돌려 주셨던 것이다. 그 돈으로 지금의 봉천동 나눔의 집 터에 있던, 그 동네에서 가장 큰 편이었던 방 5칸짜리 집을 9500만원에 구입했다. 그 바로 위에 7평짜리 집을 전세로 얻어 사택으로 쓸 수도 있었다. 서울교구에 그만한 선교 자금이 있었던 자체가 드문 일이고, 이를 요청하는 교회들의 원성도 대단했을 텐데 주교님은 온몸으로 다 막아 주셨다. 김 주교님은 당시 내게 가장 든든한 울타리였다. 상계동 시절에도 김 주교님은 종종 찾아오셔서 야학 학생들에게 100원짜리 자장면을 사주곤 하셨다. 좁은 방 안에서 무릎을 잔뜩 구부린 채 둘러앉아 자장면을 드시는 주교님을 학생들은 ‘자장면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봉천동 시절에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때는 비만 왔다 하면 지붕으로 올라가 장판과 비닐 치는 일을 해야 했다. 나눔의 집 옆에는 ‘가마니골’이라고, 지금은 교회가 된 자리인데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있을 만큼 물난리가 잦은 지역이 있었다. 청년들과 거기 들어가 장판 치는 작업을 하느라고 진땀을 빼고 겨우 집에 와 잠깐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 보니 주교님과 이정호 신부님이었다. 집 앞 계단으로 물이 콸콸 내려가고 있어 자칫 떠밀려 넘어질 수도 있는 곳에 주교님은 우산을 받고 서 계시다가 “괜찮냐, 안 떠내려갔냐”하고 물으셨다. 그냥 걱정이 돼서 와 봤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비가 더 많이 왔을 때도 나눔의 집에 들어찬 물을 퍼내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한 아이가 “밖에 할아버지 오셨어요” 했다. 설마 하며 나가 보니 이번에는 혼자 오셔서 “안 떠내려갔나 궁금해서 왔다” 하시는 것이었다. 칠순을 바라보시는 교회의 큰 어른이 그렇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데 힘을 안 낼 수 없었다. 다행히 그 기대에 부끄럽지 않게 봉천동 나눔의 집을 통해 맺은 열매는 적지 않았다. 공부방과 야학뿐 아니라 장애인 공동체, 청소년·노숙자·위기가정 쉼터, 푸드뱅크, 자활후견기관 등 지금 한국 사회 복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많은 아이디어와 모델이 거기서 나왔다. 그리고 귀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민영이, 추운 지하방에 죽은 듯이 돌아누운 모습으로 처음 만났던 소년을 잊을 수 없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 이전글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12) 누워 있던 소년가장, 사회인으로 서다 16.07.15
- 다음글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10) 9명의 야학교사와 더불어 희망찬 출발 16.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