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나눔과미래

커뮤니티

자료실

사단법인 나눔과미래는 집 걱정없는 행복한 마을을 만드는 우리 마을 보금자리 지킴이 입니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10) 9명의 야학교사와 더불어 희망찬 출발

페이지 정보

나눔과미래  16-07-15 15:57 

본문

[역경의 열매] 송경용 (10) 9명의 야학교사와 더불어 희망찬 출발

1027.jpg 서울 상계동 ‘나눔의 집’에서 처음 나와 함께 일한 동료는 모두 아홉 명이었다. 다 같이 둘러앉으니 좁은 방이 꽉 찼다. 교회 소개로 온 친구, 멀리 강화도에서 왔다는 예비교사,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친구 따라 온 사람도 있었다. 

예상과 달리 차분한 성격이 많았다. 평소 접했던 말 많고 똑똑한 사람들보다 이렇게 조용해도 속 깊은 사람들이 진짜배기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소개와 인사를 나누고, 당장 시작해야 하는 야학의 과목을 나누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눈물이 났다. 다 돌아간 후 나도 모르게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하나님, 이 멀고 보잘것없는 곳에 아홉 명이나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이들 중 한 명은 후에 내 아내가 됐다. 내 평생의 동료이자 스승, 아들 재걸이와 딸 재람이의 엄마인 한재숙이다.

그렇게 야학과 탁아소를 일단 시작했지만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참고할 모델이 전혀 없어 막막할 때가 많았다. 당시 민중교회들이 있었지만 우리와는 방향이 달랐다. 그나마 노동자 친구들의 전폭적 지지와 신뢰가 큰 힘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몸 여기저기에 원인 모를 상처가 나고 피가 터졌다. 살이 52㎏까지 빠져 뒤에서 보면 날씬한 여자인 줄 알 정도였다. 한 번은 김성수 주교님이 “너, 큰일 나겠다. 당장 병원에 가 봐라” 하시며 10만원을 주고 병원도 소개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약국에 가서 사흘치 감기약을 4500원에 짓고 나머지 돈으로 상계동에 가스레인지를 설치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큰 힘이 돼 준 이가 지성희라는 친구다. 상계동 적십자 청소년 야학 때 제자인데 고등 검정고시 합격 후 군에서 제대한 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아이를 내가 “함께 일하자”며 끌어왔다. 

아무리 나를 봐서 뿌리치지 못했다고는 하나, 힘든 노동과 갖은 노력 끝에 겨우 안정적인 직장을 잡을 단계에 이른 청년이 다시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늘 웃는 얼굴로 나눔의 집 궂은일을 도맡아 해 주던 성희. 그와 함께 불암산에 올라 소나무와 평평한 바위가 있는 우리들만의 장소에서 서로를 ‘송암도사’ ‘지뿔도사’라고 부르면서 쉬던 시간들은 나를 재충전시켜 주곤 했다. 

성희는 후에 성공회 사제가 됐고 노인 인력을 개발하고 취업을 지원하는 단체들을 조직해 이를 한국시니어클럽으로 발전시키는 등 한국의 사회복지에 크게 기여했다. 지금은 일본에서 사역 중이다. 

상계동 나눔의 집 시절 나는 내 나름의 교회 상을 정립해 나갔다. 성서, 특히 복음서를 숱하게 읽으며 나는 예수님의 사역에 철저하게 매료됐다. 단순하게 읽을수록 예수님은 너무나 멋진 분이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똑바로 내려가신 분, 그들과 함께 밥 먹고 걷고 생각을 나누신 분. 싸매고 보듬고 눈물을 닦아주신 분. 그분이 한 대로 부족하나마 따라가는 것이 내 사역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1년간 휴학까지 하면서 3년여를 매달린 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운영해줄 후임자도 구해지자 나는 잠시 상계동을 떠나 학업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1989년에는 서울 삼양동에 나눔의 집을 만들어 반 년여 동안 터를 닦은 뒤 후임자에게 맡겼고, 반 년 정도는 서초동 법조단지 개발 피해 철거민들을 돕는 데 매달렸다. 그러는 동안 사제 서품을 앞두고 본격적인 목회지를 찾아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