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9) 방 두칸 전셋집서 ‘나눔의 집’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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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5:56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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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 작업으로 몇몇 청년들과 회의를 할 때 ‘나눔의 집’이라는 이름이 언급된 적은 있었다. 당시는 ‘나누다’를 명사형으로 쓰는 예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경험을 하고서야 나는 그 이름이 이미 내게 주어졌고, 내 사명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집’을 얻는 일만 남았다. 교구에서는 반대 여론 때문에 공식 사업으로의 채택을 미루고 있었다. 예산을 배정받을 수도 없었다. ‘맨 몸으로, 천막을 치고 시작해야 하나보다’ 생각할 때 뜻밖의 길이 보였다. 교수로 계셨던 이대용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전에 서울 약수동교회 야학을 지원하려고 WCC(세계교회협의회)에 요청해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야학이 문을 닫는 바람에 얼마간 사용을 못했어. 아직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남아 있을 테니 가서 부탁을 해 보지.” 그 길로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찾아가니 “성공회를 위해 쓰기로 한 돈이었는데 마침 잘됐네요”라며 간단한 서류 작업 후에 450만원을 내주었다. 그 돈으로 상계동 도깨비시장 부근에 방 두 칸짜리 집 전세를 얻었다. 이후 모든 ‘나눔의 집’ 운동의 밀알이 돼 준 고마운 돈이었다. 1986년 9월 28일 드디어 ‘나눔의 집’ 문을 열었다. 옛 야학 때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었다. 공장 일 끝나면 모여서 밥 먹고 이야기하고 동네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토론했다. 공장에 나가기 전 새벽 5시에 모여서 버스정류장에 나가 설문지를 돌리기도 했다. 다섯 식구 정도 생활하기에도 좁은 집에 많을 때는 40여명까지 들어찼다. ‘새마을 보일러’는 수시로 터져 냉골일 때가 많았고,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배설물이 넘쳐흘렀다. 문짝은 다 떨어지고 방바닥도 곳곳이 움푹움푹 파였다. 어쩌다 20㎏ 쌀 포대를 들여놔도 2∼3일이면 떨어져 끼니는 거의 라면으로 때웠다. 그래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라면 박스 위에 십자가를 올려놓고 성경을 돌아가며 읽고 묵상하던 시간이었다. 그 감동은 소란이 잦아들어 주위가 조용해진 자정쯤에나 맛볼 수 있었다. 모인 사람들 중 태반은 신앙에 대한 기본적 이해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진지하게 동참해 준 것은 내가 신학교에 갔다는 것, 곧 사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준 것이다. 내 일이라면 뭐든지 함께하겠다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벌써 ‘나눔’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실무자를 찾는 것이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쉽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에 바빴고, 더군다나 빈민 밀집지역은 철거용역회사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이어서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매일 교회로 대학으로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 신학교 수업도 들어야 했고, 상계동 친구들도 챙겨야 했으며 돈과 먹을거리도 구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나날이 지나는 가운데 한 명, 한 명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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