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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8) 방황의 끝에 성공회 전도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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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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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송경용 (8) 방황의 끝에 성공회 전도사를 만나다

1025.jpg “기도를 하고 싶다!” 

돈이 돈을 벌고, 가난이 가난을 낳는 세상 속에서 채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소년 소녀들이 삶에 떠밀리고 때로는 죽어 가는 부조리를 생각했다. 그들의 가장 밝았던 순간, 가장 청명했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가난이 주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열패감 속에서 그들이 하나둘 꿈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 한편으로는 그런 압박감을 견디기 어려웠고 내 자신이 초라했다. 

문득 간절히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 ‘내가 봐온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자, 철저하게 사람의 문제에 매달리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내가 기댈 곳은 신앙, 내 결심을 지켜 줄 이는 오직 예수님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드려야 할 문을 하나님은 아주 가까운 데 준비해 두고 계셨다. 내가 한 달째 골방을 빌려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집의 주인, 그러니까 내 대학 선배 누나의 남편이 대한성공회 윤정현 전도사(지금은 대전교구 사제)였던 것이다. 그분의 권유로 대학로교회에 나갔고, 시작하자마자 대학생모임 청년회 등 온갖 모임에 참여했다. 그러다 윤 전도사로부터 신학 공부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박경조 주교님을 찾아가서 상의한 뒤 결심을 굳혔다. 비로소 그동안의 많은 우연들이 이 길을 위한 필연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1986년 3월 나는 당시 서울 구로구 항동에 위치해 있던 성공회대에 편입학했다. 곡절 끝에 들어간 연세대를 그만둬야 했지만 아쉽지 않았다. 세상의 가치들은 이미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이전 야학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위치에 ‘나눔의 집’을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와 같은 이름도, 구체적인 구상도 없었다. 

단지 ‘빵과 영혼이 같이 가야 한다’는 신념과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든 들어와 라면 끓여먹고 눈 붙이고 공부하고 쉬다 갈 수 있는 ‘사랑방’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었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반 사회의 관점에서는 물론 독재 타도와 혁명, 이념 논쟁에 몰두해 있던 운동권으로부터도 순진하다는 핀잔을 들었다. 한국에 들어온 초기부터 학교, 병원, 보육원, 나환자 정착촌 등을 설립하며 사회선교를 활발히 해온 성공회 교회 안에서도 내 시도는 무모하게 비쳤다. “운동권 학생이 신학교에 잠입해 교회를 기지화하려고 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그러나 편입 문제를 상의 드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잘해 보세요”라고 격려해 주셨던 박경조 주교님, 신년사목교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교’를 핵심으로 내세우시고 두고두고 내가 ‘나눔의 집’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정신적 지주가 돼 주셨던 김성수 주교님(당시 서울교구장), 새로운 교회상을 갈망하던 교회 청년과 대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눔의 집’ 이름을 지은 과정에는 신비한 체험이 있다. 교회 청년들과 함께 성공회 사회선교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고 상계동 지역에서 설문지를 돌리며 어떤 활동을 할지, 어떤 이름을 지을지 고민하던 때였다. 주일 미사의 성체성사 시간에 박 주교님이 빵을 ‘딱’ 쪼개시는 순간 내 등짝이 쫙 쪼개지는 것 같은 아픔과 전율을 느낀 것이다. 이어서 포도주가 나오는데 생생한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이렇게 쪼개셨구나, 쪼개고 나누어서 우리에게 주셨구나!” 그때 ‘나눔’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