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7) 신앙에 눈 뜨던 때 군종병 귀중한 경험
페이지 정보
나눔과미래 16-07-15 15:54본문
|
![]() 1980∼81년 당시 긴박했던 시국에서 야학연합모임과 야학교사들을 위한 교육모임이 그곳에서 자주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그때 그 건물이 교회인지도 몰랐다. ‘성 베다 관’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주변에 많이 있던 회관 중 하나인 줄로만 생각했다. 야학 동료들과 회의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잠깐씩 눈을 붙이기도 하면서 드나들었던 그곳이 몇 년 후 나를 신앙생활로 이끌었고, 신학교에 갈 결심을 하게 했고, ‘나눔의 집’의 출발점이 됐던 것이다. 당시 야학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고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갔다 풀려나는 일이 반복되자 나와 상계동 동료들은 야학을 접을 결심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위해 수유리로, 쌍문동 동대문 면목동으로 안전한 야학을 찾아다녔다. 학생들이 공장 근무 끝나고 갈 만한 거린지, 공부 내용이나 분위기는 적합한지, 받아줄 여력은 있는지 묻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사랑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그렇게도 절실하던 때에 영원히 함께할 것처럼 서로 의지했던 선배와 동료들이 곧 흩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야학 친구들을 더 책임질 수 없는 현실에 마음이 쓸쓸했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의문으로 나는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서울 동대문감리교회 목사님께 감화를 받아 몇 달 동안 그 교회 예배와 성경공부, 청년회 모임에 나갔다. 천주교 미사에도 나가 봤다. 달빛 아래 밤길을 동료들과 걷다 보면 찬송가나 성경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그래, 사랑은 이렇게 함께 걷는 거야!”라는 깨달음이 왔다. 두 달 가까이 이런 ‘함께 걷기’를 계속하는 동안 그간 자세히 몰랐던 동료들의 사정을 알게 되고, 왜 그렇게 야학에 헌신해 왔는지를 이해하면서 사랑에 대한 그 철학도 굳어졌다. 재미있는 일도 생겼다. 목사님의 추천으로 군종병이 된 것이었다. ‘반쯤 신자’에 성경책이 몇 권인지도 몰랐던 내가 말이다. 어설프고도 무식해서 용감했던 ‘군종병 보조’ 보직은 석 달 만에 밀려났지만 여러 가지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내게 사역의 길을 예비하셨던 것 같다. 1984년 제대 직후 상계동으로 가 보니 야학 자리는 폐허가 돼 있었다. 주변 지역 재개발 바람에 허물어졌던 것이다. 나는 그 폐허를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두었다. 사진은 잘 둔다고 뒀다가 잃어버렸지만 내 기억 속엔 선명한 사진이 남아 있다. “주님! 이 자리를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자리로 어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던 기도와 함께. 제대할 때쯤 대학 선후배들로부터 노동운동을 위해 사회단체나 공장으로 가자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가난한 사람들과 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방향은 정할 수가 없었다. 젊다는 것이 힘들고 그냥 살 수는 없다는 압박감이 무거웠다. 대학 선배 누나의 신혼집에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 골방 하나를 차지한 채 ‘면벽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상념들이 용솟음쳤다 스쳐 가고 또 솟구치는 가운데 하나의 생각이 점차 선명해져 갔다. “기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 이전글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8) 방황의 끝에 성공회 전도사를 만나다 16.07.15
- 다음글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송경용 (6) 가난한 곳에 더 절실한 ‘탁아소’ 시작 16.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