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김준태 인생분투기 [201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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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08 14:34본문
2011.9.29
남철관
올해 19살이니 바야흐로 소년의 마지막 날들을 가열차게 살아내고 있는 소년 준태가 있습니다. 고3인데 집인 보육원에서 제법 먼거리의 공업계고교 (요즘은 특수목적고라 부릅니다.)를 다니면서 학교를 마치면 학원으로 달려가 밤 늦게까지 입시준비에 매달립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보육원에 산다는 점만 빼면 일반 가정 아이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 녀석으로부터 이틀 전 낭보가 날아왔습니다. “중앙대학교 수시모집 1차에 합격했어요.” 허참, 대견하지요. 부모의 각별한 보살핌도 못 받는 여건의 시설에 사는 녀석이 꽤 알아주는 대학의 1차 관문을 통과했으니까요.
그런데 준태의 인생역정-아직 어린 나이의 녀석의 인생에 역정이란 제법 노숙한 수식어를 붙여준 이유를 여러분도 곧 알게 됩니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 이 상황이 예사롭지 않은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에 없는 준태의 엄마는 심한 정신질환자로 1993년에 아이를 낳고 병이 도져 하루도 정상적으로 키워보지도 못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앓다가 불과 몇 년 후에 생을 마감합니다. 참으로 기구한 여인입니다. 아빠의 인생유전은 더 합니다. 부인을 잃고 남자 혼자의 몸으로 갓난아이를 돌보면서 어쩔 수 없이 직장도 그만두고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아마 어떤 중년 사내도 이런 상황을 잘 극복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수없이 속으로 되뇌었을 것 같습니다. ‘아이를 보육원에 보낼 수는 없어. 엄마도 없는 내 불쌍한 자식, 진태는 내가 책임질거야.’
하지만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생활비를 벌기위해 간간히 다니던 날일도 나갈 수 없게 됩니다. 혼자서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 몸도 마음 지치고, 무너지면서 결국 2008년 봄에 6살난 준태를 데리고 가족 노숙인 쉼터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곳, 쉼터에서 일하고 있던 저는 준태와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쉼터는 준태에게는 좋은 울타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아빠가 일을 나가서 늦게 들어와도 저녁에 들여다 봐줄 모자가정의 엄마들이 있고, 공부방 선생님도 나쁜 환경에서 자라면서 변을 잘 가리지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똥을 바지에 묻히는 준태를 친자식처럼 돌봐주었습니다.
웃음을 잃었던 준태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고, 이때부터 ‘나 준태도 똑똑하단 말이야.’라고 시위라도 하듯이 감취어진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공부방으로 직행해 책에 묻혀서 엄청난 집중력으로 책을 읽더니, 어느새 쉼터의 최고 똑똑이로 등극합니다. 누구는 사람은 유전의 결과물로 설명하고, 개천에서 용나던 시절은 끝났다고, 빈곤층 자녀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만 준태는 이미 일곱 살의 나이에 온몸으로 그렇지 않다고 보여주었습니다. 누구나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가난한 집에서 엄마 젖 한 번 빨아보지 못하고 자랐어도 똑부러지고 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삼년 후, 다시 어두움이 밀려옵니다. 저축도 하고, 법원 영선반이란 안정된 직장도 잡은 아빠가 쉼터의 추천으로 시에서 얻어주는 무료 전셋집에 세칭 ‘자활성공 사례’로 축복을 받으면서 들어가면서 겪게 된 뜻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독립해서 일반주택에 살게 되면서 아빠는 쉼터의 상담자, 이웃의 든든하고도 가까운 손길이 사라지면서, 외로움에 그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되게 됩니다. 결국 일 년도 채 못 되어 집은 쓰레기와 옷가지가 방바닥을 가득 채운 아수라장이 되고, 썩는 냄새가 진동하면서 집주인에게 쫒겨나서 월세방으로 이사를 갑니다.
이미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준태는 아빠가 출근하면 혼자 집에 있거나 PC방을 헤매다가 동네식당에 가서 혼자 저녁밥을 먹었습니다. 씻지 않는 냄새나는 몸에 비만까지 와서 학교에서도 왕따당하면서 다시 아이는 우울해졌지만 가끔 집에 가보면 여전히 책을 끼고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준태가 중학교 2학년이 될 무렵에 아빠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던 직장마저 그만두고 서울역으로 나가고 몸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립니다. 아빠가 그렇게도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던 보육원에 보내진 준태는 서서히 아빠를 잃어버린 사춘기 소년이 되어갔습니다. 월세방에 살 때 방임으로 인한 이웃의 아동학대 신고로 아빠랑 헤어질 때도 울고불고 난리쳐서 결국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아이었지만, 아빠가 남성 쉼터를 거쳐 행방불명된 1년 후에 “아빠가 어디 있는지 저도 몰라요. 보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완벽한 ‘외톨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 무심하게도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아마 준태가 고3쯤 되었겠단 생각에 보육원에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 다행히도 준태는 그 곳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었고, 열심히 학교를 다니면서 4년제 대학에 도전할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준태의 휴대폰 번호를 받아 통화하고, 몇 주후에 드디어 만나게 죕니다. 쉼터는 알지만 나는 기억도 못하는 녀석이 가장 먹고 싶다는 돼지갈비를 먹으러 가서, 조금은 서먹서먹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미안함, 대견함, 고마움의 감정에 잠겨 열심히 먹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시설에서 퇴소해야 하는 사실이 걱정스러웠습니다. 19살 먹은 준태가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험난한 세상에 이제 곧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살 집에 대한 걱정 외에도 대학에 가면 등록금과 생활비는 어디서 조달해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용돈 얼마를 쥐어주고 헤어지면서 저는 작은 결심을 했습니다. ‘준태의 작은 울타리가 되어주자.’.
결심만 했을 뿐 일상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살던 저에게 이틀 전에 문자로 낭보가 날아온 것입니다. “중앙대학교 수시모집 1차에 합격했어요.” 두 번째 써 보는데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희망이 무엇인지, 세상은 왜 살만 한지, 왜 끈질기게 살아야 하는지를 준태는 온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축하문자를 보내면서 다시금 속으로 되뇌입니다. ‘준태의 작은 울타리가 되어주자.’. ‘준태야, 앞으로도 참 힘들겠지만 결코 쓰러지지 말아라. 존경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