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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게 개인 어느 날 [2008.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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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0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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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4.30

 

찌뿌둥한 허리, 뻐근한 어깨.

아니나 다를까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루가 멀다하게 내리는 비를 보며, 마지막 발악이라는 듯이, 구름이 머금은 마지막 물방울이라도 다 짜 버리는 듯한 빗줄기는 나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좀처럼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비 때문인지, 책상에 오래 앉아 있었는지 기지개를 쭉 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우산이 없었는지 흠뻑 젖은 채로 나에게 달려와 안긴다.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고국 그리스 사람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전하고자 쉬지 않고 달려 '이겼다'는 말과 함께 숨진 무명의 전령과도 같은 안도감을 짧은 순간이었지만, 맞닿은 가슴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누구일까? 

내가 아는 사람인가 생각해 봐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분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을여는집에 왔다는 사실에 만족한다는 듯이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우선 비에 온몸이 흠뻑 젖어 감기라도 걸리까봐 수건과 옷가지를 전해 주며 씻도록 했더니, 그 분은 서둘러 다 씻으시고, 술냄새는 그대로였지만 어느 정도 말쑥한 모습으로 돌아오시더니 목이 마르셨는지 물 두 컵을 금새 비우더니 연신 고맙다며 자신의 과거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김석훈(가명, 50세)씨는 어려서부터 군인이었던 아버지에게 많이 맞았다. 회초리, 방망이, 주먹 가릴 것 없이, 취학 전부터 맞다 보니, 매가 두려워 초등학생 때부터 가출을 하여 집, 학교보다는 거리에서 더 오래 있었다. 그러던 중 중학생 시절에 아예 집을 나와 노가다, 농장관리 등 일을 하다가 노숙을 하게 되어 왠만한 쉼터는 안 가본 데가 없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젊었을 때처럼 노가다 일도 못하고, 뽀지(교회를 돌아다니며 약간의 돈을 받는 일)를 하며 그 돈을 갖고 술을 마시다보니 알콜중독에 빠져 모든 쉼터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자신을 받아주지 않아서 여관, 찜질방 외에는 생활할 곳이 없었으며, 설상가상 생활비를 벌려고 노가다를 하다가 허리를 다쳐 그동안 번 돈 30만원을 가지고 침도 맞고 치료하여 다시 노가다를 하려던 중 찜질방에서 돈과 옷가방을 잃어버려 슈퍼에서 구걸하여 술을 먹고, 이곳저곳 비 맞으며 헤메다가 아침을여는집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말을 마친 후 석훈씨는 정말 염치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으니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보통 술 취한 분들은 싸움을 하든지 소리를 지르곤 하여 같이 생활하는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지만, 비가 오는데 이대로 내보내면 정말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방으로 안내해 드리고 이불을 펴서 바로 주무실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다음날 석훈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 기도가 통했는지, 어제보다 훨씬 말쑥한 얼굴에 말씀에도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어제 고마웠고, 오늘 광복절이라 쉬는 날이니 하루만 더 쉬었다가 내일 서울역 진료소를 통해 알콜 병원에 입원하여 완전히 알콜에서 벗어난 후 착실히 일하여 본 시설에서 운영할 예정인 매입임대주택에 입주하는 것이 꿈이라며, 이렇게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제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내일은 석훈씨가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던 술이라는 것을 벗어던지고 새출발하는 날이 될 것이다. 아침을여는집은 노숙인쉼터이다. 말 그대로 쉴 수 있는 곳이다. 그동안 아침을여는집이 석훈씨와 같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열린 공간이었나 하는 깊은 반성이 든다. 

 

어제 내리던 비는 말끔하게 개었다. 석훈씨 가슴 속에 내리던 아픔도 말끔하게 개이고, 석훈씨와 매입임대주택에서 같이 생활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