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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2007.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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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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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26

화해

이주원

 

화두가 하나 생겼다. 전통이 무너지고 그 빈자리를 성장이 메웠던 산업화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들과 화해는 불가능할까? 

 

초등학교 입학쯤에 부산 공사현장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이도 어렸지만 아버지에 대해 별다른 정이 없던 터라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도 슬프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무서웠다는 것과 간혹 담배 심부름을 시키던 기억뿐이라서 그랬던 게 아닌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성장하면서 권위주의에 눌리며 산 기억은 별루 없다. 어머니는 자상했지 권위적인 분이 아니셨기에…. 간혹 친구 집에 놀러가 친구 아버지를 볼 때마다 부친의 정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곤 했지만 그것도 그때 뿐 곧 잊어버렸다.

 

권위에 지배받지 않던 가정에서 컸던 덕택에 학교생활은 편치 않았다.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컸던 터라 억누름(권위)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지만 스승 복(福)이 없었는지 인정은커녕 배척과 미움을 받았던 기억밖에 없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 아침 자율학습 시간 때 수학문제를 못 푼다고 뺨을 지독하게 많이 맞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무척이나 모욕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때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권위에 대해 더욱 심한 거부감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수학과 나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뇌리 깊숙이 각인된 권위에 대한 거부감이 청년기의 인식과 행동을 지배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비슷비슷한 이유로 내 또래의 동년배들 또한 권위에 대한 거부감이 몸에 배었던 것 같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권위주의적 군사독재정권과의 대결이었다.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내 또래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싸우고 또 싸웠다. 그 결과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무너졌다. 그리고 가정에서 군림하던 아버지들의 권위도 몰락하기 시작했다. 

 

민주화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안기부 대공분실에서, 경찰서 취조실에서, 안방에서 권위주의 시대를 지배했던 아버지들의 폭력은 국가와 가정의 안녕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곤 했다. 물고문에 죽기도 하고, 미치기도 했으며, 군대로 끌려가고, 머리카락을 잘리고… 열거할 수 없는 폭력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국방부 시계를 거꾸로 돌려놔도 시간은 간다. 전역을 기다리는 장병들이 한 번쯤은 후임병들에게 던지는 군내부의 속담 같은 문구다. 시간은 엄혹했던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의 폭력조차 몸서리치는 추억으로 만들었다.

 

장강의 앞 물결은 언젠가는 뒷 물결에 밀린다. 한 시대의 가치와 정치권력, 경제적 기득권을 누렸던 아버지들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 아버지의 자식들이 어느새 성장하여 경제적 기득권을 제외한 시대적 가치와 정치권력의 주체가 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가 전환점이었다. 그 전에도 간혹 그 씨앗을 보이긴 했어도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후 세대와 이념간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대정신과 정치권력의 주체로 나선 자식들은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아버지들에게 경제적 기득권마저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경기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대한민국에서 시대정신과 정치권력을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 빈곤감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은 아버지들대로 명예롭게 은퇴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일순간에 불명예퇴직을 한 상황이라 마음 속 깊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보수’라는 이데올로기로 폭발시켰다. 비록 부와 권력의 형성과정이 정당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빈곤을 해결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아버지와 자식의 싸움에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는 건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러,일 4대 강국일 뿐이다. 친미세력인 아버지들과 친중에 가까운 자식들의 대결은 대한민국 공동체의 튼튼한 기반을 밑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여 국제정세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해도 한국호의 미래가 불확실한데, 세대와 이념간의 대결은 한국을 어디로 끌고 갈지 두렵기만 하다.

 

화해해야 한다. 아버지와 자식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식이 먼저 화해의 손짓을 내밀어야 한다. 이미 인생을 살만큼 산 고집불통 아버지들은 그놈의 자존심이 먼지 몰라도 결코 화해의 손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특히 보수의 가치인 ‘포용과 인내’를 상실한 한국의 보수는 편협하다 못해 괴팍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식들이 화해의 손을 내민다고 아버지들이 쉽게 잡아주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분은 덥석 잡아주기도 하겠지만, 어떤 분은 쑥스러워서 끝내 못 잡고 화해의 눈빛만 주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리고 아예 화해를 거부하는 아버지들도 있을 것이다. 

 

자식들이 화해의 손을 내밀면, 아버지들은 조금은 의심스럽고, 조금은 꺼림칙스럽겠지만 그 손을 잡아줘야 한다.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에 노출되어 있는 자식들에게 나눔을 보여줘야 한다.  

 

부를 움켜쥐고만 있으면 결국 반쪽자리 화해에 머물고 만다. 반쪽짜리 화해는 갈등과 대결의 씨앗이 될 뿐이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인 세대와 이념간의 화해는 자식들의 겸손과 포용, 아버지들의 나눔과 책임감이 어우러져야 이뤄낼 수 있는 힘든 길이다.

 

이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정략적인 계산이나 거래에 의한 타협을 중시하는 게임이론에 근거한 리더십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화해는 봉합이 아니기 때문에 정략적인 계산과 타협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화해는 종교적 열정과 믿음, 헌신성이 뒤따라야만 이루어진다. 세대와 이념간의 대결을 종식시키고 화해와 공존공영의 미래를 일궈가려면 석가모니와 그리스도와 같은 구도자의 신념과 자세가 필요하다. 구도자적 신념과 자세, 이것이 우리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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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