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인생을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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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4 17:03본문
2009.1.29
'폐허에서 인생을 생각함'
송경용
이 글은 사색의향기(http://www.culppy.org) 홈페이지에 나눔과미래 이사장이신 송경용신부님이 쓰신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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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용 칼럼 <08> 폐허에서 인생을 생각함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곳이 있다. 어려울 때나 좋을 때면 생각나는 곳,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따뜻한 얼굴들과 얽히고 설킨 추억이 가슴 아리게 남아있는 익숙한 고향산천은 아닐지라도 살다보면 그런 곳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에게도 그런 곳이 있다. 두어 시간을 온 몸의 긴장을 풀고 망연히 앉아 흐르는 강물을 보며 숲과 작은 호수 둘레를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곳, 연이어 있는 교회 마당의 비석들을 보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곳, 언제나 정갈한 잔디와 갖가지 꽃들에 눈길을 피할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집들이 있는 곳, 그 곳이 내가 좋아하고 자주 가는 곳이다.
나를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나만의 Secret Garden이라고 소개 하는 곳, 지금은 무너진 폐허로 서있어 ‘황성 옛터’로 소개하며 안내하는 곳, 중세 시대에는 융성했던 영주의 집(Manor House)이자 그 일대 지방의 권력과 경제의 중심이었던 Minster Lovell Hall 이다.
600년도 더 되었다는 Pub(술과 음식을 파는 식당이자 주막이지만 마을의 사랑 방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을 지나 오래된 돌집들과 지붕이 갈대로 엮어진 우리나라 초가집과 같은 집들이 있는 동화 같은 마을을 따라 오르다 보면 수백 년을 살아온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푸른 터널 길을 지나고 드디어 작은 교회에 들어서게 된다. 이끼가 끼고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비석들이 즐비한 교회 앞마당을 지나 교회 모퉁이를 지나면 비밀처럼, 신비처럼 부서진 채 서 있는 ‘황성 옛터’(본 이름은 Minster Lovell Hall이다.)가 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과 더불어 하늘을 배경으로 한 가득 눈에 들어온다.
두어 계단을 내려서서 무너진 집 터 안으로 들어서면 벽면 곳곳에 1820년에, 1960년에 다녀갔노라고 낙서한 사람들의 이름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돌 표면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
집 터 끝에는 ‘바람이 내어 달리는’(Windrush River) 조그만 강이 휘돌아 흐르고 산책 나온 가족들은 그 강물에 낚시를 던져 가재를 잡고 주인을 따라온 개들은 연신 시원한 목욕을 즐긴다.
계절마다, 아침과 낮과 저녁마다 하늘의 색깔에 따라 아직도 높이 솟아있는 벽면의 빛과 그림자가 다르다. 작은 호수에 거꾸로 비치는 오래된 나무들과 폐허의 그림자도 그 날, 그 순간마다, 천천히 걸으며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물빛과 함께 색이 다르고 깊이가 다르다.
교회와 무너진 집터와 낮은 담, 서로 연결된 바닥의 돌들이 포개지고 쌓여진 모양은 모두 수 백 년 세월에 깊이 팬 흔적이 역력하지만 그 세월의 흔적과 기하학적 구성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푸른 잔디와 울창한 숲, 강물과 호수, 하늘과 조화를 이룬 각각의 배치는 마치 처음부터 그 모든 것이 그곳에 함께 있었던 듯 너무도 자연스럽고 평온하다. 자연과 더불어 이제는 자연이 된 이 모든 것이 빚어내는 조화와 변주를 그려내느라 사람들은 앵글을 잡고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며 각자 또 하나의 자연이 되어간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무너진 집터가 작은 호수와 강과 숲 사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다 지난 한 쪽 끝에 그저 그렇게 서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 곳에 와서 말을 삼가고 천천히 걷다가 무너진 돌담 위에 숨을 고르며 내려앉는다.
말 없는 저 사람들은 무엇을 추억하는 것일까, 일상의 무거운 어깨를 풀고 생각을 내려놓는 것일까. 아니면 타고르의 ‘바닷가의 어린아이들’이라는 시에 나오는 석양이 지는 바닷가에서 웃고 떠들며 하늘과 바다가 되어가는 무구한 자연의 아이들처럼 저들도 그런 사람들일까.
생각을 덜어내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기위해 자주 가면서도 무심히 지나쳤던 그곳에서 작년 초에 본 한 장면으로 인해 그곳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가 되어버렸다. 교회 모퉁이를 지나 무너진 집터로 들어서려던 순간 한 어머니와 어린 아이 둘이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아직도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로 범벅인 그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얼굴을 피하며 무너진 집터로 내려서서 강물을 따라 걷다가 돌아서서 그들이 기도하던 무덤과 교회를 바라보았다. 누구의 죽음일까,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작은 호수를 한 바퀴 돌아 그들이 서 있던 그곳에 가보았다. 아주 작은 비석에는 2006년 5월 14일~2006년 5월 16일이라고 씌어있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들 가슴 속에 환하게 빛날 것’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죽은 아이의 언니와 오빠가 쓴 것으로 보이는 접혀진 편지와 함께.......
우연인지, 갈 때마다 그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이 가고나면 나도 그 무덤에 서서 이 지상에서 단지 3일만 존재했던 그의 영혼과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고 단지 3일 동안만 함께 살았음에도 그토록 슬퍼하며 진지하게 기도를 올리는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주었다. 몇 달을 가서 둘러보고 기도하는 동안 어느 날에는 돌로 조각된 예쁜 아기 고양이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작은 비석 끝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꽃이 놓여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옆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비석과 비문도 찬찬히 읽어보았다. 왼 편에는 1919년~2006년, 오른 편에는 1896년~1972년, 그리고 그 주변에는 더 이상 서있기조차 힘든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스듬히 서 있는 수백 년 된 비석들 수십 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인생은 무엇인가? 결국은 이곳에 다 묻혀서 돌에 새긴 이름과 추억조차 이렇듯 세월에 부서지고 마는 것을.......
무상함에 마음이 서글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 걸음 내려서서 무너진 집터를 지나 흐르는 강물을 등지고 바라보는 폐허와 무덤과 교회의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고 정갈하였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었을 반쪽을 잃어버린 채 한쪽으로만 길고 높이 솟아있는 집터의 벽면들도 고스란히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창문들 사이로 바람을 보내며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것은 단지 흔들리는 내 마음과 키 큰 갈대들뿐이었다. 상처받고 부서진 과거의 기억 때문에, 어디로 어떻게 가는 것일까, 확신 없는 미래 때문에 지금 이 아름다운 조화와 순리의 평온함 앞에 서있는 현재의 내가 이렇듯 불안했던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살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꿈꾸지만 단 한 순간도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래로 건너 뛸 수도 없다. 단지 주어진 한 순간 한 순간이라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강물을 따라 무겁고 혼란스러웠던 발걸음을 옮기려니 문득 가슴 한 가득 서늘하고 시원한 바람이 파고들었다. 내가 지금, 이 엄정한 현재의 한 순간에 이곳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 무너진 저 집터처럼 부서지고 깨졌던 어느 한 때의 돌이킬 수 없는 아픈 과거를 지나고 그 과거보다 더 아득한 죽음의 자리들을 지나고 나니 이 모든 것을 영원의 침묵으로 감싸고 있는 교회당이 보였다. 결국 우리가 가야하는 미래는 아무도 본 적도 가 본 적도 없는 앞으로의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지나오며 부서지고 깨졌던 과거라는 집터를 지나고 그보다 더 먼 과거의 사람들과 다시 조우하는 죽음이라는 시간을 통과해야만 이를 수 있는 그 곳에 있었다.
부서진 과거라 슬퍼하지 말자, 지나간 시간이라 아쉬워도 말자, 결국 우리는 다시 그 길을 가야하고 모든 것은 다시 그 길을 따라 돌아올 것이다. 이 지상에서 단지 3일을 살았던지 100년을 살았던지....... 세월이 지나면 모든 현재의 삶은 또 다른 현재의 삶과 시간 앞에서 단지 과거일 뿐이다. 죽음이라는 그 과거를 피할 수 있는가?
따라서 과거는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다. 당연히 아픔과 아쉬움으로만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원이라는 구원과 희망에 더 가까운 자리이다. 삶은 언제나 현재이지만 과거로 남게 될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고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는 영원이라는 미래를 꿈꾸고 기원 할 것이다.
그렇구나, 이제 다시는 허공을 향하지 말자, 그 허공을 향해 길이 없다 탓하지 말자. 미래는 돌아서는 것이다. 과거의 자리로, 본래의 내 자리로 향해가는 것이다.
본래 부르심의 자리에서 세월과 함께 아름답게 낡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는 오래된 미래이다.
낡고 무너진, 그러나 참으로 아름다운 폐허를 지나고 교회 마당 사방에 가득한 영원에 이르려는 꿈과 기원의 비석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내일도 나는 과거와 미래가 한 공간 한 시간 안에 굳건히 서 있는 현재라는 그곳에 갈 것이고 그 안에서 한 순간 한 순간을 무한한 은총으로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