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도시의 볼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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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9
노숙인, 도시의 볼모들
이주원
이 겨울 한 노숙인이 홀로 읊조린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노숙인 쉼터'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쉼터의 생활은 자기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합니다. 모로 누워도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신영복 선생의『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를 약간 바꿔서 노숙인의 심정으로 적어보았다. 물론 이 또한 쉼터에 입소한 이들이나 할 수 있는 한탄일 뿐,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야하는 거리노숙인들에게는 겨울보다 여름이 더 소중할 것이다.
1998년 IMF구제금융위기 이후 노숙인이 사회문제가 된 이래 그들의 자활을 도모하는 실험이 꽤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제대로 실험해보지도 못하고 실패했다. 그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여전히 거리와 쉼터에는 노숙인들이 살고 있다. 왜 그럴까, 문제가 무엇일까. 자활의 실험들이 소수의 성공사례를 제외하고는 많은 실패사례만 양산하는 것일까. 이를 밝히지 않고는 현실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문제는 도시라는 자본주의 공간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도시는 알다시피 산업화, 기계화, 부속화의 공간이다. 일분, 일초에 쫓기며 노동을 해야 하는 도시라는 기계의 부속인 인간들에겐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도시도 따뜻함이 있고, 생명이 살 수는 있다. 그런데 삶이 너무 팍팍하다. 이런 팍팍한 삶 속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노숙인들은 그렇게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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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라는 공간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노숙인들의 자활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꽤 어리석은 이야길 수도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 굴뚝산업의 소멸, 무한경쟁의 확대, 빈곤의 세계화. 바로 우리가 서 있는 도시에서 무능력한 그들의 자활을 말한다는 것은 이상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여기서 노숙인들이 자활을 아주 잘해봐야 도시 저소득계층밖에 못될 것이다. 정말 잘해봐야 말이다. 그나마 대다수는 거리나 쉼터 등을 떠돌다가 죽어야할 운명일 뿐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 점점 사라지는 굴뚝산업, 싸늘하고 공격적인 낙인의 눈길들. 그들이 이 모든 현실을 극복하기엔 너무나 어렵다. 따라서 자포자기만 남는다.
도시에서 노숙인들의 미래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도시의 그늘진 자락이나마 붙잡고 싶어 한다. 그나마 이 황폐한 야만의 땅엔 친구가 있다. 의지할 사람이 말이다. 비록 그와 같은 처지 일뿐이라도 말이다. 그만큼 그들은 도시의 일상적 배제와 차별 때문에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록 같은 처지의 사람들일망정 '친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곳엔 잠자리가 있다. 노숙인에겐 외부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힘없는 그를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잠자리가 필요하다. 조그만 공간에 열댓명이 엉켜서 자기에 편치는 않지만, 찌는 듯한 한여름이면 정겹던 친구도 37도짜리 열 덩어리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런 숙소지만 힘없고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집이 있다. 그 집을 남들이 '노숙자 쉼터'라 부르던 말든 말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노숙인들은 '도시의 볼모'로 잡혀 도시인들의 양심을 시험하고 있다. 외면하기엔 찔리고 돕자니 거북한 그런 '뜨거운 감자'가 되어 가고 있다.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