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먼저 쳐라
페이지 정보
나눔과미래 16-07-14 17:14본문
2009.5.1
자신을 먼저 쳐라
송경용
이 글은 사색의향기(http://www.culppy.org) 홈페이지에 나눔과미래 이사장이신 송경용신부님이 쓰신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
송경용 칼럼 <17> 자신을 먼저 쳐라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며 대동(大同)과 살림의 사회를 꿈꾸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지금은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 깊은 계절입니다. 봄이 되면 사방 천지에 꽃들이 피어나듯 부활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는 신비입니다. 두터운 지각을 뚫고 다시 피어나는 꽃과 나무와 풀들이 작년의 것이 아니듯, 내년이면 또 다시 피어날 그들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그것이 아니듯 부활은 죽음과 생명의 영속성 안에서 차원을 달리하며 거듭나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최대의 소망은 부활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영속되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믿음, ‘지금, 여기’에서의 삶도 좀 더 거룩한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는 것, 이 땅에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 될 때 죄인으로 심판 받지 아니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부활에 대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육신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또한 많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부활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분열과 갈등, 반목과 질시가 가득한 우리 사회가, 그런 시대를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이 이 부활사건의 전말을 한 번쯤 되새기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과 반목의 뿌리는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차별과 편 가름을 극복하고 보다 크게 하나 되어 살아갈 수 있는가(大同社會)를, 어떻게 하면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를 치유하고 살릴 수 있는 ‘살림의 터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를 숙고해보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라는 사나이와 그를 둘러싸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외된 변방, 시골 출신의 한 사나이가 구세주라는 의미의 ‘그리스도’를 자처하며 ‘중앙’에 나타나자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분열보다 더 극심한 논쟁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한갓 목수의 아들이며 시골출신에 학력도, 경력도 불분명하고 장가도 안간 젊은이가 제자들이라 불리는 추종자 그룹을 조직하고 현세상의 질서를 비판하며 억눌린 자, 온유한 자, 가난한 자가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외쳐대자 비상이 걸립니다. 더군다나 그가 가는 곳마다 자발적이며 열광적인 ‘펜클럽’이 조직되고 그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자 당시 세계제국이었던 로마의 권력에 기대어 세세천년 자신들의 세상이 영속될 줄 알았던 중앙의 권력자 그룹은-정치, 경제, 종교, 사법 등- 당황하며 허둥대기 시작하고 온갖 악담을 퍼붓거나 유포시키며 그를 잡아 죽일 계책마련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드디어 그들의 계책은 성공하게 됩니다. 그의 제자중의 한 사람을 매수하기도하고 우매한 사람들을 선동해서 그를 국가와 종교를 배반한 죄인으로 만들어냅니다. 그 이후의 재판 절차는 책임전가와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사형을 언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에도, 그리고 주로 정치범들을 처형했던 십자가에 매달리고 나서도 당시의 권력자들은 군대와 대중들을 동원해서 끊임없이 그를 모욕하고 조롱하며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그를 죽이고 맙니다.
끊임없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했던 눈엣가시 같았던 그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을 것입니다.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그를 따르던 대중을 동원해서 데모도 하지 않았으며 법을 이용해서 재판을 걸어오지도 않았지만 권력자들은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했던 일이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자비롭게 대하였고 전심을 다해 하느님 나라의 위로와 희망을, 곧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탈진하도록 병든 자들을 치유하며 돌아다니는 일이었습니다. 가끔 부정한 관료들, 마음이 굳은 종교인들과 맞서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대화’로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으로 그들을 책망하거나 설득해냈습니다. 한 번의 과격한 언사(바리새인들에게 했던 ‘회칠한 무덤, 독사의 족속들’)와 한 번의 과격한 행동(성전에서 책상을 뒤엎었던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며 거들먹거리던 ‘종교인들’에게 했던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상황파악을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거나 일을 저지를 때에도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오히려 타이르고 가르치며 더 깊은 명상과 기도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들 중의 일부가 배신하였을 때에도 그들을 가르치며 기다리고 하느님께 그들을 용서하여주십사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던 간음한 여인을 돌 맞아 죽을 각오로 변호해서 살려내기도 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거들먹거리던 사람들, 종교의 이름으로 약자를 탄압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권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행동은 ‘비폭력, 무저항’이었습니다. 힘없는 어린 양처럼 온순하였고 죽음으로 이끌려가는 현장에서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던 그를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것처럼 행세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두려워하였고 끝내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뒤집어 씌워 죽이고 말았습니다.
부활은 바로 이런 이야기 뒤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평등과 자유, 나눔과 평화의 새 세상을 꿈꾸며 천 년을 기다리던 구세주가 그냥 그대로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선량한 민초들의 천년의 꿈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며 이 세상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지으신 이의 뜻과도 배치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죽임에 대한 살림의 승리이며 미움과 증오, 폭력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좌절과 분노에 대한 희망의 승리이며 분열과 갈등에 대한 대동(大同)의 승리입니다.
부활한 예수를 첫 번째로 만난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가난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나타나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부활 이후 첫 번째 메시지를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전하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에 관여했던 사람들조차도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계층, 민족 등 모든 경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분열과 갈등, 폭력과 증오의 광기가 서린 세상을 피해 숨어있던 제자들도 부활한 예수를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고 난 이후로 백팔십도 변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미움과 폭력을 조장해내는 모든 장벽들을 허물어내는 가장 강력한 힘, 희생과 헌신, 사랑의 전도자들이 되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칩니다. 바로 직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람들로 ‘부활’한 것입니다. 가난했고 겁도 많았으며 유식하지도 않았던 그들이 2천 년을 이어온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우리자신도 우리 사회도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스스로와 우리가 속한 사회를 향해서는 보다 엄격해져야하고 걸림이 없는 비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회를 향해서는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사회, 약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위로와 도움을 전해주고 희망을 나누는 사회, 신분이나 지위, 출신이나 권력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로 판단하는 사회, 미움과 갈등, 폭력을 조장하는 죽임의 언어들은 자제되고 오직 진실에 입각한 살림의 언어들이 소통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 그 자체가 미워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공격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미움은 미움을 낳게 되고 폭력은 폭력을 수반하게 되어있습니다.
쓴 소리, 독한 행동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향해 먼저 행해져야합니다.
자신을 먼저 쳐야 크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짧은 이 한 마디에 우리가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치유되고 어떻게 거듭 날 수 있을 것인지, 우리 모두를 살려내고 크게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는 부활의 모든 신비가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