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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목자, 빈자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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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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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7

가난한 목자, 빈자의 벗

송경용

 

이 글은 사색의향기(http://www.culppy.org) 홈페이지에 나눔과미래 이사장이신 송경용신부님이 쓰신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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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용 칼럼 <16> 가난한 목자, 빈자의 벗

 

 

 

 

노가다 목사, 빈민촌의 성자 허 병섭! 

 

그가 쓰러져 있다. 지난 1월 추운 겨울 어느 날 강남 성모 병원 근처 공사장에서 꽁꽁 언 채로 발견되었다. 

수 십 년 동안 청계천, 하월곡동에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 살다가 무주 진도리라는 곳으로 내려가 '오리농법 농사꾼'으로 살아가면서 푸른꿈 고등학교와 녹색대학을 세우며 살아가던 허목사님이 원인도 모르는 병명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 영혼의 벗이자 동지인 부인 이 정진 선생이 일주일 앞서 쓰러지셨고 뒤이어 그를 간호하던 허 병섭 목사님이 똑같이 원인불명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벗어 던지며 일평생 가장 낮은 곳으로만 다니며 고생이라는 고생은 골라가면서 하던 이 시대의 '참된 목자'를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지게 하시다니......

 

20여 년 전 삼양동에 두 번째 '나눔의 집'을 시작하고나서 며칠 후에 허 병섭 목사님을 모시고 후배 목회자들이 모여 어떻게 해야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는지를 배우고 있었다. 밤이 새도록 그 분의 말씀을 경청하며 복된 가난을 사는 법에 대해 성찰하며 토론했었다. 허 목사님의 결론적인 당부는 '푸욱 썩어라!'는 것이었다. 스스로가 가난해지지 않고는 결코 가난을 이해 할 수도 없고 가난한 사람과 참된 벗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푸욱 썩어 거름이 되려하지 않고 거름의 양분으로 열매가 되는 삶을 추구한다면 이 가난한 삶의 현장에서 버티지 못하리라는 참으로 지당한, 본인이 일생을 두고 실천해온 삶의 이야기였다.

 

허 목사님은 내가 목회자가 되기 이전부터 내 신앙의 사표이셨다. 나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회, 새로운 신앙을 꿈꾸던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러 일으켜주고 길을 제시해주던 분이셨다. 화려한 언변이나,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살아가는 삶과 그분이 만들어가고 있던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각 분야의 수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허 목사님은 청계천, 월곡동의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넝마주이,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그들과 하나가 되어갔다. 그가 만들어가던 교회(동월교회)에서는 일용직 노동자, 동네 아주머니도 설교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무당이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최초로 북과 장구를 이용한 국악예배를 시도하였으며 사회와 교회에 비판적이던 젊은 영화, 문화, 문학 예술인들이,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아가듯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개발과 성장의 그늘에서 변방으로 밀려나던 사람들에게, 7-80년대를 살아가던 젊은이들에게 그의 삶은 영감의 원천이었고 40여 평 남짓했던 판자촌 교회는 순례 터가 되어갔다. 당연히 그는 감옥을 가야했고 20 여 차례가 넘는 연행과 구금을 당해야했다.

그러나 그는 가까운 후배들에게도 한 번도 자신이 당했던 고난을 내세우거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수줍었고 지나칠 정도로 겸손했던 사람이었다. 그 과거를 내세워 명성을 얻거나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던 분이셨다. 정부에서 주겠다던 훈장도, 막사이사이 상도 다 고사했다.

 

나중에는 '목사직'도 내던지고 완전한 노동자가 되어 막노동꾼으로 살아가며 '일꾼두레'라는 최초의 노동자 협동조합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가 실험한 일용직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삶과 경제적 공동체인 '일꾼두레'는 노동자 협동조합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도록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민간복지 활동, 정부정책을 만들어 가는데 밀알 같은 원천이 되어주었다.

 

고단한 서울 생활을 마치고 그가 농사를 배워보겠다며 시골로 향할 때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가 좀 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며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만의 바램이었다. 그가 사는 어느 곳이든 그의 집은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교회를,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어갔다. 그가 시골로 향할 때 그의 수중에는 단 200여 만 원이 들려있었다. 30년 넘는 목회자로, 수많은 책을 출간하고 노동을 하며 살아온 그의 수중에는 시골의 조그만 텃밭이 달린 폐가를 한 채 살 수 있었던 200 여 만 원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노동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부인과 함께 잡초가 우거져있던 집 안팎을 깨끗이 정리해내었고 2년이 지나면서는 동네 노인들로부터 타고난 농사꾼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오리농법으로 지은 쌀을 지인들에게 부쳐주었으며 그의 집에 가는 날은 '밀알 농법'과 '생명과 교육'에 대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과 토론을 하기도 하고 강의를 듣기도 하는 날이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의 마을회관, 대안학교인 푸른꿈 고등학교와 녹색대학 설립으로 분주해진 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살아오면서 이룩한 많은 업적을 나열하고 기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삶과 배치되는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보여준 참된 종교인, 참된 목자로서의 모습이 그리울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가장 낮은 곳을 온 힘을 다해 받쳐주던 그런 사람을 위해, 한 알의 밀알 같았던 그의 삶이 다시 시작되기를 위해 이 세상이, 우리 모두가 다만 한 순간의 기도라도 받쳐주기를 원할 뿐이다.

 

(허 병섭 목사와 그의 부인 이 정진 선생은 현재 신천리 연합병원에 입원중이시고 아직까지도 두 분은 의식이 다 돌아오시지 않은 채 누워계신다. 두 분을 위한 기도와 후원을 위해 인터넷카페가 개설되어있다. 많은 이들의 기도가 두 분에게 일어설 힘이 되리라 믿는다.)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