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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 종부세 위헌 판결과 '미네르바'사건을 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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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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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31

인간에 대한 예의- 종부세 위헌 판결과 '미네르바'사건을 보며 -

송경용

 

이 글은 사색의향기(http://www.culppy.org) 홈페이지에 나눔과미래 이사장이신 송경용신부님이 쓰신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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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용 칼럼 <12> 인간에 대한 예의- 종부세 위헌 판결과 '미네르바'사건을 보며 -

 

 

 

'낙수효과(Trickling Down Effect)'라는 말이 있다. 잔에 계속 물을 부으면 아래로 넘쳐흘러 아래에 있는 잔에도 물이 채워진다는 말이다. 물대신 위스키나 막걸리를 부어도 마찬가지이리라. 잘 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잘 나가도록 온갖 특혜와 인센티브를 주다보면 그 과실이 아래로 흘러내려 모든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주로 성장정책을 지지하는 분들이 주장하는 그럴듯한 이론이다.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붓다보면 언젠가는 넘쳐서 흘러내릴 테니까.   

문제는 생각도 이기심도, 스스로 움직일 힘도 없는 컵이나 잔에 자비로운 누군가가 한 없이 부어댈 때에만, 적절한 크기의 잔이 놓여있고 그 잔이 넘칠 때마다 미리 준비한 자신들의 잔에 따라내며 바꿔치지 않는 정직한 ‘상류층’이 존재할 때만 유용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 이론에는 인간의 이기심을 최대한 발휘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사람들을 종속시켜 버리는, 무자비한 성공 제일주의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경제적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 그 욕망과 이기심이 경제를 성장시키는 동력이라 믿으며 그 욕망과 이기심을 ‘기업가 정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부는 기업가 정신, 상품으로 외화 된 욕망과 이기심이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시장’을 보호하고 육성해야하며 그 경쟁에서 살아남도록 온갖 인센티브를 주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조금이라도 이 원칙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은 ‘좌파’로 지목 받고 공격당한다. 

  도대체 어떤 크기의 잔이 놓여 있는지, 누가, 어떻게, 어떤 종류의 물을 부어대고 있는지, 부어댄다고 한지가 언제인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지 묻는 사람들도 ‘반 시장적’인 사람들이다. 그 내막을 공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즉각 억압과 위협이 뒤따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처한 경제 현실을 분석, 고발하고 알기 쉬운 말로 설파해온, 다음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미네르바’라는 필명을 가진 분의 글을 읽어보시라. 그리고 그 분이 처한 현실을 보시라.

 

생각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분석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 아닌가. 인간이 컵이나 잔이   아닐진대, 당장의 생계가 막막하고 하루하루가 불안한 ‘살아있는 생명’들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저 아래 하층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아먹어야하는 처지의 사람들도 같은 국민이고 시민이며 인간일진데 어떻게 컵처럼, 잔처럼 그렇게 놓여 지면 놓이는 대로, 부어지면 부어지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며 생겨나는 계급과 계층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인간의 존엄 그 자체는 결코 나눠질 수 없는 신성불가침이며 정부의 제 일 책임은 그 가치를 보호해주고 지켜내는 것이 아니던가. ‘상류층’의 성공과 삶이 중요하면 ‘하류층’ 사람들의 삶도 그만큼 중요하고 고귀한 것이다. 자신들의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하다면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경청 할 줄 알아야하는 것이다. 개인 간에도 이것이 삶의 기본일진데 하물며 모든 국민의 삶이 걸린 국가적인 차원에서야 더 중요한 원칙이 아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종부세’가 위헌의 요소가 있으니까 헌법의 전문가들이 위헌이라고 판단했을 것으로 믿는다. 억울한 분들도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억대가 넘는다는 차량에 수백만 원짜리 옷을 걸치고 천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해외에서까지 쇼핑여행을 즐기는 분들까지도 죽기 살기로 세금을 못 내겠다며 아우성을 치는 모습은 정말 허탈하고 슬프게 만든다.

 

'미네르바'라는 분이 '가슴 속에서 한국인이라는 말을 지우고 싶다, 오늘부터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다.'라고 토로한 절망이 가슴을 울리고 있다.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농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직불금'을 타가가기도하고. 천일을 넘게 텐트에서 호소하며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한 없이 가혹하다. 복지 예산은 사정없이 깎여나가고 언론은 재갈이 물려있다. 공직자들과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염치도 없고 '四加知(먹고 자고 배설하는 이외에 인간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네 가지, 즉 仁義禮智)'도 없는 행동들이 도처에서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발호하고 있다. 

물 붓는 손과 잔을, 그 흐름을 감시하고 성찰하며 지켜주어야 할 일부 종교, 시민단체는 자정능력을 상실해버렸고 또한 상실하도록 전방위적인 위협과 억압이 가해지고 있다. 

이런 정글 같은 상황에서 낙숫물은 흘러내릴 수 있는 것인가? 언제나 우리 서민들은 그 물에 목이라도 축일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낙수효과를 신봉하면서 상류 계층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고 해도 이런  무자비한 상황은 너무하는 것 아닌가. 

계급, 계층의 이해를 지켜주는 것이 정파의 임무라 할지라도 일단 국가를 통치하는 사람들의 임무는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는 지켜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무 순진하다고 할 것인가.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자 보수파의 거두였던 드골 대통령은 피식민지 국가와 그 나라 백성을 지지했던 사르트르를 구속, 처벌하자는 여론에 ‘그도 프랑스!’라는 말로 비판적 지성을 살려놓았다. 데이비스라는 영국 보수당의 유력한 당수후보자였던 정치인은 노동당 정권이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영장 없이도 며칠을 구금하도록 하자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마그나 카르타’와 시민적 자유를 지켜온 영국 시민들의 고귀한 투쟁사를 상기시키는 성명을 발표한 뒤 자신의 선거구민들에게 다시 심판 받겠다며 의원직을 내어 던졌다. 

 

노동당이나 진보정당이 아니라 보수당, 그것도 지도자들의 행동이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환경보전과 공공의료, 연금을 비롯한 각종 사회복지 정책 등 국민들의 삶의 질에 관련된 정책은 노동당이건 보수당이건 가장 어려운 계층의 삶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내어놓기 위해 매일 같이 사력을 다해 경쟁한다. 비록 권력을 향한 정치의 속성과 본질은 같을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가치라고 이야기한다.

영국 사회복지 제도의 근간이며 세계적으로도 복지국가의 정형을 제시한 이정표라 할 수 있는 ‘베버리지 리포트’도 ‘Warfare에서 Welfare로’라는 기치 하에 보수당 정권, 영국의 역대 수상 가운데 가장 부유한 집안 출신중 한 명이었던 처칠 수상시기에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베버리지라는 사람은 노동당원 이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기록되고 지금도 여전히 인구에 회자될 만큼 양자, 양당 간의 큰 갈등도 있었지만 노동당이건 보수당이건 그 당시 마련된 복지제도의 가치와 근간을 지켜내고 발전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 복지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재원은 당연히 조금 더 잘 사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것이 정치가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닌가. 이런 예의를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낙숫물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내핍과 희생’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슬픈 이야기만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언제 어느 곳에서든 희망은 있는 법.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제도와 정책, 말 같지도 않은 뉴스에 휘둘리지 않고 당장의 생계를 걱정하면서도 ‘가치와 철학, 근본과 방향’을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희망의 전조이다. 각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토론과 작은 규모라 할지라도 각 분야에서 공공선(公共善)을 위한 의미 있는 행동을 조직하고 참여하는 다양한 계층의 소신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사회가 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찰랑대는 윗물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바닥을 훑으며 무겁게 밀고 가는 밑 물의 힘으로 강물은 바다에 이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련다.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의 자존심을 훼손 시켜버리는 낙수(落水)이론보다는 맑고 깨끗한 생수를 함께 나누어 마시는 ‘품격과 예의 있는 삶’을 믿고 꿈꾸었던 첫 마음으로 다시 정진, 기도해야 하겠다.        

지난주일 성찬례를 드리며 읽었던 성경 말씀으로 절망 대신 희망을 새겨야겠다. 

 

........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4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