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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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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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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19

한 친구를 기억하며

송경용

 

이 글은 사색의향기(http://www.culppy.org) 홈페이지에 나눔과미래 이사장이신 송경용신부님이 쓰신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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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용 칼럼 <10> 한 친구를 기억하며

 

 

 

태어나면서부터 척추가 마비되어 걸을 수 없는 친구가 있었다. 

나이가 30이 되도록 양 손에도 신발을 신고 기어 다녔다.

준수한 얼굴, 똑똑한 머리, 정연한 말솜씨,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남들처럼 허리를 세우고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 모든 것이 본인에게나 보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욱 짐스러웠다. 차라리 들을 수도 볼 수도 생각도 할 수도 없었더라면.......

 

 

 

10대와 20대 초에는 동네 깡패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동네의 골치 덩어리가 되기도 했고 술과 담배와 욕설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욕설을 퍼붓고 망나니짓을 해도 사람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불쌍해서 피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절망과 허탈감에 빠져 죽을 생각도 했다. 한 번 비틀어지기 시작한 마음은 좀체 곧게 펴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어렵게 연결해준 일자리도 하루를 넘기지 못했고 스스로 해본다며 시작한 구두닦이와 행상도 며칠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동네 형님들에게 얻은 몇 푼의 돈으로 사서 마신 술에 늘  취해있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도 반응은 언제나 부정적이었다. 

때는 70년대, 80년대 초였다. 장애인들이 교육받고 보호받을 아무런 사회적 장치가 없던 시절이었다. 곁에서 도와주고 싶어 하던 사람들도 그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청춘을 죽이고 있던’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턴가 동네에 있던 다방, 식당, 술집에 취하지 않은 맨 얼굴로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지하나 2층으로 내리고 오르는 계단을 열심히 ‘네 발’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러다 앞으로 고꾸라지지나 않을지, 2층 계단을 오를 때면 뒤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을지 또한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 더운 여름 한 철을 하루도 쉬지 않고 온 동네의 가게마다 들러 성냥을 팔러 다녔다. 그를 알아보는 가게 주인들은 처음에는 ‘불쌍한 마음에’ 하나 둘 팔아주었으나 성냥이 매일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고 여유롭지 못한 동네 가게 주인들의 상황에서 연민의 마음도 하루 이틀이었다. 손에 끼고 다니는 신발에 땀이 차고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열심히 온 동네를 기어 다녔지만 소득은 신통치 않았다. 보통 사람들 같아도 힘든 상황이었다.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그 친구는 죽기보다 싫어했던 장애인 수용시설에 입소하기로 했고 나와 함께 그 곳에 가서 입소 확인서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생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 노역 등의 부당한 대우와 시설장의 부정을 참지 못하고 항의소동을 일으키고는 퇴소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들리는 말로 남산 근처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휠체어를 탈 형편도 안 되었으니 어디를 가나 그저 기어 다녔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을지 분명했는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잡을 수 없었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십년이 조금 더 지난 어느 날 굵은 목소리로 ‘형님, 접니다!’ 하는 전화가 걸려왔고 그 이튿날 봉천동 나눔의 집 앞에 근사한 승용차가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달려와 멈추어 섰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멋진 사내가 그 친구였고 차에서 내려 전동 휠체어에 갈아타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억센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데 어찌나 힘이 세던지 손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힘차게 끌어안고 인사를 나누고 있자니 반대쪽으로 내려 역시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는 아가씨를 가리키며 ‘형님, 제 아내 될 사람입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놀랍기도 하고 감동이 되기도 하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차를 나누어 마시며 어떻게 된 것인가 물으니, 수용시설에서 나와 서울역 근처 길거리에서, 남산에서 죽기 직전까지 방황하고 헤매다가 우연히 같은 처지의 장애인을 만나 자립적인 삶을 위해 장애인들 스스로 세운 장애인 공동체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무 조각을 배워 살아 왔다는 이야기를 담담한 표정으로 들려주었다.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착하고 예쁜, 곧 결혼 할 아가씨를 소개할 때는 어찌나 크게 웃어대는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기적이었다. 말 그대로 사고무친, 갈 곳도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사라졌던 십 년 동안 나는 줄곧 어느 길거리에서 또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어느 시설에서 춥고 외롭게 생을 마쳤을 것 만 같은 불길한 상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내가 주변에서 보아왔던 가난한 장애인들의 삶이었고 말로였다.

 

그가 자신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낼 수 있었던 힘은 ‘나눔’이었다고 했다. 남산에서 만난 장애인을 따라 하루 종일 기어서 다다른 곳은 서울시 외곽의 허름한 천막촌이었다. 그곳에는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 십여 명이 함께 생활하며 열심히 목각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하루 한 끼를 먹던 세 끼를 먹던 모두 똑같이 나누어 먹었고 장애의 특성에 따라 역할도 나누고 일도 나누어 맡는 ‘능력에 따라 필요한 만큼’이라는 원칙이 지켜지는 공동체였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아픔도 희망도 나누다보니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이라고 여겨졌던 물질적인 가난, 육체적인 장애는 그저 조금 불편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상처받고 아팠던 사람들끼리 부대끼면서 진정한 우정과 사랑, 정신의 풍요로움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던 지난 십 년을 통해 자신도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대강은 알고 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청첩장과 차에 싣고 온 한 보따리 선물을 나눔의 집 사람들에게 안겨주었다. 돌아가는 그들의 차가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는 내내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결혼한 뒤로 그 부부는 매 주말마다 차량을 이용해 어려운 처지의 노인들을 위해 병원과 나눔의 집에서 운영하는 주말 농장에 모셔다 드리는 자원봉사를 십 년 넘게 해오고 있다. 좋은 글과 기도문, 음악 등을 인터넷 동문 모임에 올려서 여럿이 나누게 하는 일도 열심히 하고 있으며 친구들의 연락과 경조사를 챙기는 일도 도맡아 하고 있다. 두 아이는 어느덧 초등학교 학생들이 되었고 부인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재봉틀을 이용해서 부업을 하고 있으며 그 친구는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 둘 다 허리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면서도 사지가 멀쩡한 비장애인들보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들을 위해 더 많이 걱정하고 더 많이 움직이며 더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나서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 부부를 생각하면 죄스러워지고 부끄러워진다. 사지가 멀쩡하다고 ‘정상’이 아님을, 물질이 부족하다고 해서 삶의 고귀한 의미를 누릴 수 없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정말로 포기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있는 허망한 욕심들, 수시로 일어나는 미움과 분노, 더 낮아지지 못하는 교만임을 이제는 나보다 신실한 그 친구와 그 가족의 기적같이 아름다운 삶을 통해 깨닫고 있다.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