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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성탄절 숙직을 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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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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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5

2010년 성탄절 숙직을 서면서..

오범석

 

이탈리아 베네치아건축대학의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교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말을 로마역사에서 뽑아내어 해석하는데, 이 말의 뜻은 ‘예외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의 인간’, ‘살해할 수는 있지만 희생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존재’로 해석한다.

즉,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로 간주하여 통치하고 심지어는 제도적으로 반사회적 인간으로 낙인찍어 사회적으로 추방시키는데, 여기에 우리들의 이웃이 있고, 내 부모와 형제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사회의 잉여인간으로서 가난하게 살아간다. 

그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존재감 이상의 대접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여기에 포함되는 부류일 수 있다. 능력과 노력에 비해 지나치게 대접을 받는 존재, 사회적 효용 메카니즘에 능숙한 센스와 주변인들의 호의와 비호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기회는 대부분의 호모 사케르에게는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을 확율이 더 높은데 비해, 태생적이로나, 사회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미 주류세계에 포함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후에는 자본의 힘이 가세했을 뿐이다. 

오늘이 성탄절인데, 그런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baby Christ가 오신 것일텐데, 우리는 그 정신을 잃어가는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 같다. 

우리가 술을 잘 먹는 사람을 주류라고 하고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는 사람을 비주류라고 하는 우스게 소리를 하는데, 우리는 이런 의미의 주류가 아닌 다양한 형태의 권력을 가진 주류에 의해 정제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의와 평등의 가치가 오히려 이상하고 반사회적이며 좌파적인 사회악으로 치부될 수 있다.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존 로스의 사회정의 속에 녹아 있는 르상티망, 즉, '열패자의 원망'이 서려 있는 사회에 대해, 정의를 어떻게 공정하게 제도화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런 철학 원론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땅에 인간은 모두가 동등하다는 인식이다.

즉, 누구도 인간은 호모 사케르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연히 우리는 인간을 등급별로 나누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암울한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인간은 동등하며 인간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 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우리는 알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복지는 박애주의에서 전문성을 외치면서 튕겨져 나왔으나 불행히도 소유의 재분배라는 구조주의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인간의 존재성을 소유, 즉 가난과 부의 기준으로 나뉘는 개념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나눔이라는 포장으로 말이다. 나눔은 개량적 나눔으로 점점 더 발전하고 있으며, 나눔속에서도 자본의 필요성으로 더 많은 소유를 집착하게 됨으로써 재분배의 아름다운 배분의 가치는 이제 개념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이다.

사회복지조차도 소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다음은 종교의 차례이다. 이것은 종교의 실천영역, 즉 프락시스(praxis)로의 회기이다.

그러나 이 땅의 종교는 어떤가? 그야말로 몸살을 알고 있다. 종교란 본래 困而知之, 즉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하나, 이미 현재 종교는 너무 많이 가지게 됨으로 그 속에는 깨달음이 잠시도 존재할 겨를이 없다. 역시 종교의 수행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다.

우리 사회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노숙인 쉼터에서 2010년 성탄절 밤을 숙직으로 보내면서 이 사회에 가난한 빈자들의 영혼의 방주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내일은 주일 설교를 해야 하는데, 나처럼 이미 주류의 끝으머리에서 최소한의 기회를 빵부스러기처럼 받는 자에게 성탄의 의미에 부합하는 올바른 실천이 나올 수 있을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하루를 마감하려 한다.

 

암울한 우리 시대를 위한 아기예수의 빛이여 오소서

이 땅에 양식이 없어 성탄절 아침에도 눈물 짓는 어머니들을  위해 

그리고 이 땅에 한 평의 땅도, 집도 없어서 거리에서 추운 옷깃을 동여매고 잠자는 

우리 노숙인들을 위해

저 북녘땅에서 위정자들의 권력의 방편으로 고통당하는 동포들을 위해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찢어지고 상한 마음으로 해체되어지는 가정의

수많은 죄없는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소리 없이 나그네를 섬기는 이 땅에 수많은 작은 예수들의 해방을 위해

빛으로 오소서

빛으로..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