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개발사업의 전개와 정책변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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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5:24본문
-판자촌에서 뉴타운까지-
Ⅱ. 판자촌의 해체
1. 판자촌의 확산과 주택재개발정책의 등장
1960년대 한국은 국가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을 펼쳤다. 이를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는 ‘선성장 후분배’ 논리로 노동자의 임금과 농산물의 가격을 낮게 유지하였다. 그 결과 농촌인구가 대규모로 도시의 노동인구로 이농이 확산되었다. 농촌인구의 도시로 이농현상은 도시의 인구를 증가시켰는데, 특히 서울은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이루어졌다. 1960~1966년 사이에 연평균 6.5%, 1966~1970년 사이에는 9.4%의 인구가 증가했다. 하지만 부족한 주택 수와 도시빈민층을 형성하는 하층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으로는 집을 살 수가 없었다. 이들은 결국 방치되어 있던 산등성이나 구릉지, 하천변 등에 무허가정착지인 판자촌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판자촌들은 도시공간을 재편성하려는 서울시의 정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한 쪽에서는 철거가 이루어지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또다시 판자촌이 형성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서울시의 판자촌은 점차 확대되었다.
철거와 판자촌의 형성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철거민이 될 처지에 있던 판자촌 주민들의 저항은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일방통행적인 행정으로 인해 하소연할 곳도 없고 도와줄 세력도 없던 주민들이 철거에 대해 ‘몸으로 맞서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특히 1970년대 초 경기도 광주(현재 성남시)에서 발생한 철거이주민들의 저항은 서울시로 하여금 재개발정책을 바꾸게 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철거민들의 집단적인 생존투쟁이 정치성을 띤 대규모의 사회운동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됐다. 판자촌을 정리하는 정비사업정책에서 도시빈민의 다수를 차지하던 판자촌 주민들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전략이 요구되었다. 이 대응전략 차원에서 공권력을 동원한 강제철거와 주민들의 경제적 동원에 기초한 주택재개발정책이 1970년대 들어서 등장하였다.
주택재개발정책은 1973년 3월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하, 임시조치법)이 제정되면서 등장했다. 임시조치법의 시행을 계기로 서울시는 주택개량 대상의 불량주택지구를 일괄 지정하였는데, 종전의 개량사업을 거쳤던 시민아파트 단지, 양성화 지구 그리고 현지개량시행지역도 다시 재개발지구로 지정하였다. 한편 이 법에 근거하여 재개발지구지정과 함께 불법건물에 합법성을 부여 할 수 있는 법적기틀을 마련하였다.
임시조치법은 도시재개발 정책을 도심재개발과 무허가 부량주택에 대한 주택재개발로 구분하는 제도적 장치로 불량무허가 정착지를 재개발지구와 철거대상지역으로 구분함으로써 개량재개발과 철거정책을 동시에 병행적으로 수행 가능케 하였다. 임시조치법에 의한 주택재개발사업의 성격은 ① 무허가 정착지와 도시빈민에 대한 강제력 행사의 자제와 제도화된 주민 동원 체제의 구축, ② 재개발에 따른 재정 부담의 주민 전가, ③ 무단 점유 국공유지의 상품화로 요약된다.
특히, 임시조치법에 의해 주택재개발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1975년 AID차관 도입에 힘입어 공공시설 투자비가 조성된 점을 들 수 있다. AID차관은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을 위해 미국이 제공하는 장기융자의 하나로 미국 대외원조법(FAA) 중의 경제원조 분야인 국제개발법(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 AID)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AID 차관이라고도 부르는데 미국의 대외원조 공여방식이 원조에서 차관으로 전환됨에 따라 AID 차관이 미국 대외원조의 주종이 되고 있다. AID차관을 통해 주민은 융자로 국․공유지를 구입하고 국․공유지에 주택개량비용과 자체 비용으로 주택을 개량․개축하고, 서울시는 토지매각이용형식으로 양여된 차관으로 공공시설 설치비용을 전액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AID차관이 중단되는 1982년부터 이 사업은 시행은 중단되었다.
1970년대 주택재개발정책은 판자촌을 정상주거지로 정비하고 주택문제를 해소하는데 기여했지만, 판자촌 주민들의 경제적인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주택재개발사업은 판자촌 주민들의 주거비 부담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상적인 주택공급을 강요했기 때문에 도시빈민들의 안정적이며 저렴한 주택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즉, 이 시기 주택재개발 정책도 무허가 불량주택 집단 거주지인 판자촌에 살고 있던 도시빈민들의 경제적 능력을 무시한 채, 정상적인 주택 및 택지공급 위주의 재개발 정책이었다.
이 시기 주택재개발사업의 부작용으로 오히려 도시빈민인 판자촌 주민들은 다시 주변의 판자촌 지역으로 대거 이사하기도 했다. 이는 주거환경과 주택문제 해결이라는 서울시의 본래 목표와는 어긋난 채, 도시빈민들의 집단주거지를 해체시키고 저렴한 주거공간부족 현상을 오히려 심화시켰다.
2. 재개발사업의 민영화 : 합동재개발
서울시는 1970년대 말 ‘위탁방식에 의한 재개발’을 통해서 판자촌을 정비하고자 했다. ‘위탁방식에 의한 재개발’은 주민들이 형식적인 재개발실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서울시가 실질적으로 재개발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대형 건설업체가 전체공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하는 철거 및 주택재개발은 주민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증가시켜서 더 이상 밀어붙이기가 어려웠다. 주민들과 마찰을 줄이면서 도시공간의 효율적인 정비라는 두 마리를 쫓아야 하는 서울시로서는 정부주도의 공영개발이 어려워지자 ‘민영화 전략’으로 급선회를 하였다. 당시 건설업계도 해외건설업이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건설시장의 활로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서울시의 이해와 건설업계의 이해가 맞물리면서 판자촌 해제를 둘러싼 새로운 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다.이 새로운 정책이 현재까지의 재개발사업 패러다임인 ‘합동재개발’ 방식이다. 합동재개발 방식은 땅(택지)을 제공하는 주민(가옥주)과 사업비 일체를 부담하는 건설회사가 함께 판자촌을 전면철거 재개발하는 재개발방식이다.
합동재개발 정책은 사유화된 무허가 정착지인 판자촌을 개발해서 개발수익을 극대화하는 개발사업이었다. 또한, 방치된 저개발지역인 판자촌을 적극적으로 해체하고 정상적인 부동산 상품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건설자본을 제도적으로 유치하는 정책이기도 했다. 합동재개발사업은 이처럼 ‘민영화’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개발수익의 극대화를 원하는 건설자본의 논리가 대체되는 계기가 된다. 즉, 도시정비사업의 공공성은 축소되고 시장논리가 강화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무단 점유 토지에 대한 국가와 주민 간의 갈등관계에서 개발수익의 분배를 둘러싼 가옥주(토지등소유자)와 세입자 및 건설자본 간의 대립과 갈등관계로 그 갈등의 주체와 구조가 바뀌게 된다.
서울시는 건설자본이 참여하는 합동재개발을 추진함으로써 숙원이던 판자촌 재개발사업을 활성화하게 된다. 합동재개발사업은 서울시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고식 이었다. 서울시는 재개발지구에 보유한 국공유지를 매각해서 재정수입을 얻고, 재산세가 면제되었던 판잣집이 철거되어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새로운 세수를 확보함으로써 재정 증가를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가옥주와 세입자 등의 복잡한 이해관계자를 가옥주 조합과 민간건설업체 간의 관계로 압축시킬 수 있어서 주민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결국 서울시는 최소한의 재정과 사업인가 위주의 행정력만으로 최대한의 재개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비록 판자촌에 거주하는 세입자는 철저하게 개발이익에서 배제되었지만 가옥주 입장에서도 합동재개발사업은 경제적 부담을 줄여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합동재개발은 개발이익을 일부의 주민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서 주민부담을 줄일 수 있었으며, 특히 신축된 아파트의 입주 후 부동산 가격의 상승으로 상당한 시세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합동재개발 방식의 도입 이후 가옥주 위주이기는 하지만 주민들도 판자촌 재개발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합동재개발 방식의 도시재개발사업은 부동산 가격 상승을 전제로 기획된 도시정비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순간 작동할 수 없는 메커니즘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합동재개발사업은 판자촌 같은 불량한 주거지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부족한 주택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판자촌에 삶의 뿌리를 두고 보금자리를 일군 주민들 입장에서는 도시재개발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도시재개발사업은 판자촌 주민들이 볼 때, 재개발사업은 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한 강제퇴거 및 비자발적 이주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에 들어가 살 형편이 되지 못했던 판자촌 주민들에게 ‘아파트’는 그림의 떡이었다. 더구나 재산권도 없던 세입자들에게는 유랑민이 되게 하여 또 다른 불량주택을 찾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합동재개발사업은 1990년대 내내 도시빈민의 저렴주거지였던 판자촌을 거의 해체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 도시재개발사업의 전개와 정책변화 (4)까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