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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개발사업의 전개와 정책변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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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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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에서 뉴타운까지-

Ⅰ. 서민의 눈물과 설움이 담긴 판자촌

1. 광복과 인구의 증가

판자촌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아픔이자 급속한 도시성장의 상징이었다. 또한 판자촌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난의 공간이기도 했다. 판자촌은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기형적 도시화로 인해 형성된 집단적인 빈민촌이다. 주로 1950~1970년대 서울 등의 대도시로 무작정 상경한 빈민들이 대도시 변두리의 구릉지, 하천변에 지어진 불량주택인 판잣집들로 이루어진 무허가정착지로 달동네로 불리기도 했다.

서울에서 무허가 불량주택인 판잣집이 얼마나 일반적인 주거지였는가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에 전국 도시 대비 무허가 불량주택의 60%가 서울에 집주해 있었으며, 1970년내에 전체 주택 대비 무허가 불량주택이 20~30% 수준에 달했다. 또한 1980년대 중반 서울시 전체 인구의 13%가 판자촌에 거주했었다. 판자촌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1945년 일제의 강점당하던 대한제국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감격스러운 광복을 맞이한다. 하지만 당시 한국사회는 격동하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직면한다. 광복 이후 38도선 이북은 소련의 관리 아래에 놓이게 되고, 이남은 미국의 관리 아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상황의 불안은 인구의 대이동이라는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진다.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의 식민지배를 피해 해외로 나가있던 동포들이 다시 귀향하였고, 이북의 공산정권 수립에 불안을 느낀 북한주민들도 38선을 넘어 남하하여 서울이나 인천 등 도시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946년과 1947년에 월남을 결행한 이북주민들은 북한에서 지위 박탈 및 박해를 피해 남하한 지주 출신이거나 상류층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로, 주로 서울과 경기․강원 지역에 정착했던 것이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서울 600년사』(1983)에 따르면 광복 이후 남한으로 유입된 인구는 169만명으로 유입된 인구 중 3분의 2이상이 일본에서 귀환한 동포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만주, 중국 순이었다.

광복 이후 각종 빈민구제 사업이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더욱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도시로만 몰려들었다. 이 시기 농촌주민들도 경제적 곤궁을 피해 지방에서 서울로 몰려들었다. 서울의 경우 1945년 12만7,301동이던 주택의 수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연평균 5.9% 증가했지만 서울로 귀환하는 수많은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1945년부터 1950까지 가구의 수는 5년 동안 10.9%의 증가세를 보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해외동포들의 귀환과 이북 주민들의 월남, 농촌인구의 유입 등의 이유로 도시의 주택은 특히 서울의 부족하게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가지 38도 이남을 관리 및 통치했던 미군정은 해방 조선의 행정 전반을 책임지는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의 질서유지와 기아상태를 모면하게 해주는 식량정책뿐이었다. 미군정에게 중요한 것은 전화국, 철도청, 병기창, 주요 교량 같은 시설들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지 점점 더 심각해지는 주택문제에는 별반 관심도 두지 않았고 능력도 없었다.

미군정이 실시한 유일한 주택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적산가옥에 입주해 있던 난민들을 위해 조선주택영단 측에 주택을 건설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조선주택영단은 후암동․용두동․안암동․신설동․사근동․홍제동 등에 주택을 지어 난민들을 수용한 것뿐이다. 이러한 정책을 펼치게 된 것도 그나마 서민들의 희망이었던 적산가옥마저 모두 미군정 관리들이 사용하게 되어, 적산가옥에서 쫓겨나게 된 주민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군정 3년을 거쳐 1948년 8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사회부에 주택국을 신설하고 주택정책을 펼치려고 했으나, 의지에 비해 능력이 부족하여 제대된 주택정책을 펼치지 못한 채 1950년 1월 주택국은 폐지되고 사회국 주택과로 전락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로서는 공산주의 체제인 이북 정권과 대립정인 상황에서 최우선적인 국가의 과제를 치안과 국방 그리고 기본적인 법령체계를 갖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에게 주택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시기 이승만 정부가 취했던 주택정책은 일제 강점기에 만든 ‘조선주택영단’을 ‘대한주택영단’으로 개명하고 관장했던 것과 미군정이 접수했던 적산가옥을 다시 시민들이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로서 신규주택을 건설 및 공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50년 적산가옥 관리에 대한 정부의 정책을 입안했고, 해당 주택에 거주하고 있었던 연고자에게 우선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1949년 당시 서울의 가구 수가 30만인데 비해 주택 수는 19만호밖에 되지 않아 주택보급율은 63%에 불과했다.

 

2. 한국전쟁과 판자촌의 형성

광복 후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가옥에 사는 사람들은 그나마 쾌적한 주거생활을 하였으나 적산가옥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서민들은 하천변이나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당시 주택정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공에 의한 주택의 보급은 전무하다시피 했으며, 당연히 판잣집이 얼마나 있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한국전쟁 전 서울에 거주한 시민들 중에서 정상적인 주택을 보유한 사람은 전체의 53%에 불과했다고 한다. 손세관(2002)은 서울시민의 절반은 셋방에 거주하거나 판잣집 등의 불량주택에 거주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서울의 판자촌은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되었던 토막촌을 중심으로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공간적으로 확장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행해진 토지수탈정책과 공업화를 위한 강제적 노동력확보는 무허가 거처인 ‘토막’의 증가로 이어진다. 당시 서울로 유입된 인구의 대부분이 서울 정착을 위해 마련한 주거는 ‘행랑살이’라는 문간과 무허가 임시거처인 ‘토막’이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를 넘어서면서 토막민촌은 지속적으로 증가추세를 보이며 토막이 소수의 특수계층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공통적인 경관으로 인식되었다.

1942년 경성제국대학 위생조사부 발간 『토막민의 생활과 위생』에 따르면, 1940년 말 경성부에 4,292호의 토막이 존재하였고, 토막민은 20,911명이었다. 경성부 외곽가지 포함 서울지역의 토막민수는 약 36,000명까지 추산된다. 아현동, 신당동, 홍제동, 돈암동, 용두동, 신설동, 제기동, 충신동, 창신동, 금호동, 왕십리, 청량리 일대, 미아리 길음교 밑, 용산구 동부이촌동, 서부이촌동 일대, 마포구의 공덕동, 도화동, 마포 산 일대, 노량진, 영등포동 일대 등 당시 교외 전역에 걸쳐 형성되었다.

서울의 불량주거지인 판자촌 형성이 급격해진 시기는 1950년 한국전쟁이후 본격화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서울시 19만동의 일반주택 중 34,742동이 완전 소실 또는 파괴되었으며, 반쯤 소실되거나 파괴된 것이 20,340동에 달했고 그중에서도 중구와 용산구 관내의 피해가 가장 심해 전체 주택의 78%가 완전히 소실되거나 파괴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몰려드는 피난민들과 농촌인구로 인해 판잣집은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농촌인구는 영세 경작을 포기하고 도시로 가서 지게 품을 파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이촌향도를 시작했다. 이촌향도(離村向都)는 산업화로 인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도시와 농촌 간 경제발달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이들은 주로 정착한 곳이 바로 청계천변과 해방촌으로 유명한 남산이며, 인왕산, 안산 산기슭, 현저동 일대, 낙산 일대, 답십리 일대 등이다. 1953년 통계에 의하면 서울에 위치한 토막집은 2,643호이며, 판잣집은 5,356호였다고 한다. 전쟁이전의 판자촌이 주로 서울 변두리의 다리 밑이나 하천 주변 또는 언덕 위에 주로 자리했다면, 전쟁이후 판자촌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도심지에 마구잡이로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전쟁 후 급히 지어진 간이․구호주택과 같은 공동주택 역시 규모가 작은 데다 주택자재 등이 열악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량주택이 되고 말았다.

1954는 서울시는 불량주택, 토막집, 판잣집 등 무허가 건물의 철거방침을 발표했다. 당시 정부는 이렇듯 ‘강력한 단속’을 경고했지만 실제 판자촌을 정비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서울 도심지를 비롯한 판자촌이 난립하게 된 것은 선거로 인한 선심 행정도 한 몫 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부와 자유당의 불법건축물의 묵인 정책은 무허가 건축물의 난립을 부채질하였다.

선거를 앞두고 허용한 1956년 7월의 ‘판잣집 철거의 잠정적 보류 조치’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조치는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사항으로 무허가 정착지에 대한 그 동안의 철거정책 기조와는 상반되게 ‘도시 하층민의 주택난 해소’라는 다소 빈약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또 선거후에는 다시 철거를 단행했다는 점에서, 도시빈민의 정치적 동원을 노린 일시적인 선심행정의 표본이었다.

 

3. 불량주택 판자촌의 확산

한국전쟁은 당시 서민들의 주택난을 가중시키는 재앙이었다. 당시 정부는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더구나 1950년대 말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여 장기집권을 위한 선거부정,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는 4.19 시민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4.19혁명으로 인해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1960년 인구주택 국세조사를 실시했다. 이는 정부수립 후 최초로 실시된 인구주택 조사였는데, 인구는 물론 가구 수, 배우자 관계, 교육 정도, 경제활동 상황, 직업 등과 함께 가옥 및 거주 상태까지 조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지 7년이 지났지만 주거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한국주택협회가 1995년에 발간한 『한국주택협회 15년사』를 보면, 전국의 자가 거주 가구가 79.3%이고 서울이 56.5%로 나타나고 있는데, 겉으로 보면 당시 주택 보유율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조사에 나타난 주택은 정상적인 구조를 가진 주택 이외에 이른바 비정상적인 구조, 즉 선반․창고․판잣집․천막․토막․움막 등의 임시 가건물 또는 불량 무허가 건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가주거 시설, 즉 호텔․하숙․병원․기숙사․고아원․양로원․사찰 등과 건물과 야영 캠프 같은 것도 주택으로 포함시켰기 때문에 실제의 자가 거주율은 훨씬 낮았을 것으로 본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 노동집약적 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한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뒷받침하려면 저임금의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는 농산물가격 낮게 유지하는 정책을 지속하여 농촌인구의 이농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이농인구의 도시유입은 산업노동력을 상대적으로 과잉시켜 도시빈민과 하층노동자를 구조적으로 만들어냈다.

이촌향도가 시작된 1960년대 농촌지역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노동자들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증가하는 노동자들을 수용할 기반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도심지역을 정비․활용할 필요성이 높아졌고, 기존 판자촌에 대한 철거와 철거민 이주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한다. 당시 철거와 철거민 이주 정책은 저렴하고 안정된 주거 공간의 확보보다는 산업화에 따른 도시 공간 구조의 재편성 과정으로서, 비효율적으로 이용되던 도심 공간을 합리화시키고 도시 외곽 지역을 개발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시민의 약 15%에 해당하는 인구가 강제적으로 이주하게 된 대규모 철거정비정책에 따라 곳곳에서 정부와 마찰이 빚어졌는데, 광주대단지 사건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당시 더욱 악화되어 갔던 대도시 특히 서울의 주택공급능력으로는 저소득의 도시빈민이 일반적인 집을 장만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도시빈민은 도심의 국공유지 등에 무허가정착지의 판자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도시무허가 정착지의 형성은 상대적으로 토지의 효율적인 이용을 저해하기 때문에 도시공간의 재편성을 위한 60~70년대 전반에는 철거, 재정착, 해체의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기존 판자촌을 도심외곽으로 재배치한 정부는 정책방향을 바꾸게 된다. 즉, 새롭게 발생한 판자촌은 억제하되, 정부가 유도해서 조성된 판자촌은 양성화하여 현지개량사업을 통해 안정화시키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1973년 주택개량사업을 별도의 도시계획사업으로 규정하여 국․공유지를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무상으로 양도하도록 한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었고, 1976년 「도시재개발법」의 제정하여 주민들의 자조적 노력을 통해 판자촌 내 무허가 불량주택을 재개발하도록 하는 주택개량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이 시기에는 그 전후와 비교해서 철거횟수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철거민들의 저항 역시 강도나 빈도가 약해졌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판자촌 지역의 국공유지 불하 등을 내걸고 민심안정정책 수단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자촌 거주자(도시 저소득층)들은 무단점유한 토지를 매입하고 주택을 개량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택개량사업은 매우 부진하였다. 또한 신규 판자촌 형성이 어려워지면서 기존 판자촌이 고밀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판자촌에 농촌에서 이주한 세입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한때, 판자촌 거주민의 인구가 서울시민의 13%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판자촌 형성에 대해 세종대 김수현 교수는 “판자촌은 정비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정부의 묵인아래 비제도적으로 운영된 주거복지정책”이라고 한다. 경제개발을 해야 할 정부의 입장에서는 판자촌이 저임금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저렴주거지로 충분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급격한 도시화 추세를 따라 갈 수 있는 주택공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판자촌을 묵인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가 미약했던 한국은 ‘판자촌’이라는 비제도적 주거복지정책을 유지해오다가 88올림픽을 계기로 도시정비의 필요성과 압력이 증가하던 상황에서 철거민의 저항, 사회복지욕구의 증대, 주택문제의 악화 등 사회적 압력에 의해 본격적으로 공공임대주택 정책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  도시재개발사업의 전개와 정책변화 (4)까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