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초, 어머니께서 석 달밖에 못 사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영국 런던에서 런던대 교목과 성공회 한인교회 사제로서 일할 때였다. 나는 다급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아직은 기력이 있으실 때 편지, 아니 보고서를 드리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쓰다보니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만나 온, 함께 일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내 지난날을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다행히 얼마 후, 어머니는 좀 더 사실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한 지인이 “기왕 쓰기 시작한 글인데 책으로 내라”고 권했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펴낸 것이 ‘사람과 사람’(생각의나무)이다. 지나간 시절이라고, 편치 않은 기억이라고 꺼내기 싫어하는 이야기, 그래서 잊혀지고 무시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저변에서부터 지탱한 사람들, 내게는 가난을 알려주고 예수께로 인도해 준 사람들이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서도 내 자신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들의 삶을 조금 더 알리고 싶어서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셨고 우리 사회에 나타내신 일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겪은 서울 강남 룸살롱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연세대와 성공회대에서 만난 친구들, 선배들, 교수님, 신부님들 이야기를 할 것이다. 서울 상계동 야학에서 만났던 여리고도 강했던 젊은이들, 상계동 봉천동 ‘나눔의집’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 방황하는 청소년들, 사랑에 굶주린 어린이들, 장기수 선생님들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들에게 엄마가 친구가 선생님이 돼 준 동료들, 나를 깨우치고 자극을 준 스승과 도반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왜 지금까지 ‘나눔’을 화두로 일해 왔는지, 내가 구현하려 한 나눔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 모든 과정 안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말할 수 있다.
딱 이맘때인 1979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지금처럼 덥지는 않아 봄꽃이 찬란했던 연세대학교 교정. 전공 책을 옆에 낀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어대며 스쳐 지나는 벤치에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강남 신사동으로 향했다. 발밑으로 축축 늘어지는 그림자로 시간을 가늠하며 룸살롱 ‘천지문’으로 들어간다. 불을 켜고 청소를 하다보면 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속속 들어선다. 번호로 이름이 매겨지는 아가씨들, 조직폭력배들, 주방 아주머니들, 밴드, 웨이터, 보조….
조명이 다 켜지면 그 공간은 얼마나 호화롭게 변모하는지. 웨이터 보조 중 말단인 나는 ‘ㄷ’자로 늘어선 ‘룸’들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서 주방에서 나오는 안주와 술을 각 방 웨이터에게 전달했다. 덩어리 얼음을 잘게 부수어서 양주 담을 통에 넣는 일도 했다. 정신없이 얼음을 깨다 보면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기도 했다.
나중에 대한민국이 다 아는 ‘깡패’가 된 인물도 그곳 조직 말단이었다. 이들과 사회 저명인사, 판검사, 회장 사장들이 흥청망청 어울렸다.
어느 날이었다. 룸 하나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났다. 웨이터 몇 명과 함께 뛰어 들어갔다. 그땐 전혀 몰랐지만 내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준 하나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약력=1960년 전주 출생. 1986년 상계동 ‘나눔의집’ 설림. 1990년 봉천동 ‘나눔의집’ 설립. 1993년 대한성공회 신부 서품. 청소년·노숙자·위기가정 쉼터, 자활후견기관, 푸드뱅크 등 창설 및 운영. 2006∼2009 영국 런던대 교목·런던 성공회 한인교회 주임사제. 현 사단법인 나눔과미래 이사장. 걷는교회 사제.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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